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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정신의학, 역사적인 만남

“정신을 통제할 수 있을까?”
2010년 개봉된 영화 <인셉션>에서 제기된 질문은 심리학과 정신의학이라는 두 학문이 궁극적으로 추구해 온 목표이다. 정신의학의 Psychiatry는 정신(Psyche)을 치료(iatry)한다는 의미이고, 심리학의 Psychology는 정신(Psyche)을 연구(logy)하는 것이다. 서로 비슷해 보이는 두 학문은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 글에서는 정신의학에 초점을 맞추어 두 학문의 역사적인 만남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정신의학의 탄생

18세기 말 이전까지도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정신과(psychiatry)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정신병이 18세기 말부터 생긴 것은 아니다. 정신병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질병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나 정신병자라고 불릴 사람들은 있었고, 사회별로 정신질환에 대처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은 존재했다. 하지만 정신의학의 탄생 이전의 치료법들은 지극히 원시적이었다. 1817년 아일랜드 한 지역구 의원의 기록에 따르면, 광인들은 1.5미터 정도 되는 구덩이에 강제로 들어가야 했고, 그 곳에서 죽을 때 까지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광인들은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했으며, 사회적으로 철저히 매장 당했다.
18세기 말, 치료를 위한 수용소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 유럽을 휩쓴 계몽주의 사상은 이성의 힘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계몽의 열기에 도취된 사람들은 광기를 근절할 수 있다는 믿음에 가득 차 있었고,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정신질환을 치료하고자 했다. 수용을 통한 최초의 정신과적 치료를 제안한 사람은 윌리엄 바티이다. 그는 수용소에 치료적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고, 나아가 정신질환은 치유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첫 만남

이와 같은 낙관적 분위기 안에서 정신의학사에서 기념비적 인물인 필립 피넬이 등장한다. 계몽주의 심리학과 사회진보철학에 한껏 고무된 정신과 의사 피넬은 정신질환의 치료 가능성과 인도주의적 돌봄이라는 개혁적 이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넬은 수용소를 통한 감금은 반드시 치료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며 수용소는 심리적 치료를 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피넬은 ‘근대 정신의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피넬 이후 정신의학은 심리학적인 치료를 강조하게 된다. 피넬의 개혁 아이디어는 그의 제자 장-에티앙 에스퀴롤에 의해서 발전된다. 에스퀴롤은 1817년부터 의과대학생에게 정신과 강의를 시작했고 8년 후에는 파리 근교의 대형 수용소의 소장이 되었다. 그는 정신질환이 ‘정열’의 과잉으로 일어난다고 믿었으며. 수용소는 환자들을 불건전한 정열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독일의 에른스트 호른, 미국의 벤자민 러쉬 등에 의해서 정신치료 개혁은 계속 진행되었고, 그 결과 “도덕 치료”라고 불리는 심리학적인 치료가 확립되었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의
등장과 소멸

한편 생리학, 해부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정신질환을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이 바로 그 시도이다. 이 학파의 교수들은 수용소에서의 지루한 일상이 아닌 마음과 뇌의 체계적인 연관관계에 대한 연구가 정신질환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19세기 의학계의 전반적 흐름인 임상-병리적 연구를 통한 정신질환 치료를 시도했다.
빌헬름 그리징거는 1세대 생물정신의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1865년 당시 48세였던 빌헬름 그리징거는 내과와 정신과를 겸하고 있었고,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 정신과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생물정신의학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대학병원 정신과의 근대적 모델을 창립하기도 하였다. 그리징거는 수용소 식의 정신과 진료를 거부하고, 종합병원에서와 같이 환자를 보았다. 이후 많은 대학이 그리징거 식의 클리닉을 도입하였으며 생물정신의학은 점점 정신의학계에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세대 생물정신의학은 환자의 삶으로부터 지나치게 유리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면서 몰락하게 된다. 반세기에 걸친 신경해부학과 신경병리학 연구는 신경매독을 비롯한 극히 소수의 질병 이외에는 아무런 유용성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뇌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소멸되는 시기가 오자 1세대 생물정신의학은 사라지게 되었다.

에밀 크레펠린과
정신의학의 새로운 전기

생물정신의학의 붕괴를 주도한 사람은 에밀 크레펠린이다. 뇌지도 연구의 선구자였던 파울 플레치흐의 조수였던 크레펠린은 그의 연구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세 달만에 조수 자리를 그만두었다. 크레펠린은 젊어서부터 심리학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실험심리학자인 빌헬름 분트에 열광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생물정신의학이란 현미경이나 쳐다보는 쓸모없는 놀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크레펠린은 당시 정신과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독일의 하이델베리크 대학 클리닉 정신과 교수로 임명된다. 그곳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는 두 가지 혁신적인 시도를 한다. 첫째는 환자의 병력과 퇴원 당시의 상태를 기록한 카드를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징거 식 통합 정신과를 모방하여 뛰어난 연구자들을 기용하는 것이었다.
크레펠린이 불러들인 사람은 19세기 말 독일 신경과학의 거장이 될 프란츠 니슬과 알로이스 알츠하이머였다. 니슬은 세포핵 염색법을 개발하여 신경조직학에서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이고, 알츠하이머는 알츠하이머 병의 원인을 규명한 사람이다.
크레펠린은 이처럼 유능한 신경해부학자들을 곁에 두고 있었지만, 환자의 정신 기능 측정이라는 심리학적 방식의 연구를 중단하지는 않았다. 그는 환자의 상태를 꼼꼼하게 기록한 카드를 바탕으로 질병들을 임상적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크레펠린의 관점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고, 전 세계 정신의학계는 크레펠린의 연구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크레펠린은 시체 부검 등을 통해 해부학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생물정신의학자들과는 달리 살아 있는 환자의 병력을 자세히 기록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크레펠린과 수련의들은 정신 질환을 하나하나 분류해갔으며, 1893년의 교과서에서는 정신분열증을 독립적인 질병으로 설명함으로써 정신의학을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단어의 대열에 올려놓게 되었다.

정신분석의 흥망,
그리고 정신의학의 미래

1856년 태어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억압된 성적 요소가 정신 질환의 주된 원인이라는 정신분석법을 주장한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세기말 유럽의 분위기와 맞물려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프로이트의 열렬한 추종자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학문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반대자들을 병적인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 몰지각한 사람으로 비판하였다. 그 결과 카를 융, 오이겐 블로일러 등의 지지자들이 등을 돌렸지만 정신분석은 더욱더 기세를 넓혀 갔다.
정신분석은 점차 정신의학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학문적으로 검증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만 갔다. 특히 교육받은 중산층 사람들의 열기에 힘입어 정신분석을 사용하는 정신과 개업의들의 수는 날로 늘어만 갔다.
이는 크레펠린에 의해 구축된 정신의학계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 크레펠린의 조수였던 구스타프 아샤펜부르크는 정신분석은 암시에 지나지 않으며,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정신분석이 모든 문제를 성의 문제로만 귀결하려는 것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미국에 전파되었고, 아돌프 마이어와 같은 열렬한 지지자들에 의해 미국 정신의학계를 풍미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의 역사에서 일종의 단절 시기나 다름없었다. 정신분석은 특정 계층의 자기성찰 욕구를 채워줄 뿐이었고, 수용소의 정신질환자들에게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후 정신분석적 방법은 폐기되고, 1990년대 초의 정신약물학 시대가 열리면서 2세대 생물정신의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후 정신의학은 정신약물의 발달과 뇌과학의 발전에 더불어 새로운 융합 학문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허기영 기자/서울
 <zealot648@e-mednew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