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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찍은 다큐 영화 ‘하얀 정글’

의사 송윤희, 한국 의료제도를 고발하다

하얀 정글을 아시나요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기 위해 왕복 다섯 시간을 이동했다. 예과생다운 무모함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공동체 상영이 힘든 작품을 모처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소식에 이미 내 마음은 강남 발 버스에 올라타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다큐멘터리는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던 다섯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탈바꿈시킬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얀 정글’. 이 영화를 만든 현직 산업의학과 전문의 송윤희씨는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사회를 이렇게 칭한다. 아무런 제재도 없이 그저 생존을 위해 수많은 맹수들이 치열하게 혈투를 벌이는 곳. 지금 우리나라 의료사회를 표현할 이보다 더 마땅한 은유법이란 찾기 힘들어 보인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늘어나는 개인 병원의 수, 대학병원의 병상 수, 지하철 벽면에 빼곡히 자리 잡은 병원 광고들... 이런 총체적인 증가 추세를 보면 수요자를 위한 의료공급 또한 친절하게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지금 당장 약 값 몇 만원이 없어 환자가 죽어나가는 것이 정글의 실상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무엇일까. 의사의 신분을 가진 여성이 어쩌다 카메라까지 들게 된 것일까.

영화의 도입부에 이런 자막이 뜬다. ‘이 영화는 시장에 내맡겨진 우리 의료제도의 한계 때문에 갈등하는 환자와 의사들에 대한 이야기다.’ 감독이 파고들어가 본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은 마치 낳긴 낳았으되 끝까지 애정을 가지고 돌보지 않은 아이와 같다. 즉 의료비용은 국가가 대고 있지만 의료공급은 민간이 책임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때문에 공급을 담당하는 민간 쪽에 별다른 규제가 가해지지 않아 그 부피를 점점 팽창시키고 있는 것이다. 팽창을 위해선 자금이 필요하다.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은 곧 의료시스템이 복지보다 산업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작금의 대형 3차 병원들은 의료에서 복지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미처 몰랐던 진실들

필자와 같이 영화를 본 기자들은 입을 모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한 대형병원에서 과장급들이 모인 성과회의 중에 과 별로 한 달 간 수익을 순위표로 만들어 발표를 하는 장면을 꼽았다. 그 외에 외래를 하는 전문의들이 일당 외래 환자 수와 수익 현황을 매일 문자로 통보받는 장면, 무리를 해서 들여온 억대의 수술용 로봇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환자들에게 불필요한 비 급여 (보험이 되지 않는) 검사를 권하는 실태를 보여주는 장면 등을 꼽았다. 여담이지만 실제로 로봇수술은 흉터를 남기진 않지만 보통 장점이라 광고하는 합병증과 부작용이 나타날 확률이 적다는 점은 미국에서도 통계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단다.

수익을 내기 위한 병원의 무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박진석씨는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 병원에서 약 3400만원의 치료비가 나올 것이라 통보받는다. 의료비 내역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박 씨는 건강보험심사원에 그의 치료비를 의뢰해보았고 실제로 드는 치료비는 1400만원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병원에 이의를 제기했고 긴 싸움 끝에 2000만원을 다시 받아내었다. 하지만 그 후 병원으로부터 ‘재발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 일어나는 의료계에서 현 정권 총리가 주장하는 의료민영화가 시행된다고 상상해보자. 그나마 지금 미약하게나마 숨 쉬고 있는 공공복지의 개념은 사라져버릴 것이고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의료 혜택을 받고 있는 빈곤층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모든 중산층을 위한 수도꼭지까지 모두 잠기고 말 것이다.

진짜 말하고 싶은 이야기

이렇듯 ‘하얀 정글’은 사회고발적인 내용을 가득 담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딱딱하기 만한 다큐멘터리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이 곳 저 곳에 복병처럼 숨어있는 감독의 따뜻한 감수성이 그대로 전해진다.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는 할머니를 인터뷰한 후 넌지시 건넨 파스 몇 장에, 백혈병 때문에 천사가 되어버린 아이의 아버지를 인터뷰한 후미진 병원 계단 난간에, 힘겨운 삶의 파도에 깎이고 깎였을 할아버지의 옅은 미소에 비친 햇살에... 그녀가 말하고픈 진짜 이야기가 있다. 흘러가는 시간과 난데없이 찾아오는 질병 앞에 인간은 무력하게도 모두 평등하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권리인 스스로의 건강을 지킬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 있어야 하고 하늘 아래 누구도 그것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 제도는 인간을 배신해선 안 되며, 기업은 잠시라도 숨을 고르고 인간을 생각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란 결국엔 똑같이 변해갈 수밖에 없다는 나의 생각은 편견이었음을 알게 해준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향후 짧게는 6개월, 길게는 5년 6개월 안에 ‘하얀 정글’에 내던져질 전국의 모든 의대생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 배급을 맡은 한국 독립영화협회와 인디다큐페스티벌은 극장개봉에 앞서 이달부터 공동체상영에 들어갔다. 즉, 다수의 관객이 관람을 원하면 배급처가 관객을 찾아가서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이다. 문의는 02-334-3166. (사진은 앞서 말한 백혈병에 걸려 천사가 되어버린 아이와 아이를 안고 있는 아빠의 모습. 아이는 나라에서 후원받지는 못했지만 국민의 성금을 받고 치료를 받은 바가 있다.)

이선민 기자/을지
<god0763@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