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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돌아왔다

94호(2013.09.05)/문화생활 2013. 9. 7. 14:41 Posted by mednews

인문학이 돌아왔다

<정의는 무엇인가> 와 스티브 잡스로 대표되는 인문학의 귀환,
그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인문학, ‘학문의 전당’에서 떠나

 

지난 학기, 기말고사는 마무리되고 도서관에 학생들의 발길이 뚝 끊겼던 때, 중앙대 총장실 앞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비교민속학과, 아동복지학과, 가족복지학과, 청소년학과 4개 과의 폐지를 이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의결했기 때문이다. 인문계열 학과들은 전국적으로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한남대는 철학과와 독문학과를, 목원대는 독일언어문화학과, 프랑스문화학과를 포함한 5개 학과를 폐지키로 결정했다. 배재대의 독문과와 불문과도 같은 운명에 처했고, 국문과는 외국인이 한국어를 익히는 한국어과와 ‘한국어문학과’로 통폐합하기로 했다. 경남대는 철학과를 없앤다고 한다. 계속되는 불경기에 취업률은 낮아지고, 사립대학들이 취업률과 같은 성과위주의 대학교육을 경쟁력이라 내세우면서 인문학이 수난을 겪고 있다.

 

떠나간 인문학, 서점에서 재회

 

하지만 서점이나 기업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 보인다. 대한출판문화협회의 통계를 살펴보면 2010년, 전년에 비해 철학분야는 33.1%, 어학분야는 20.8% 의 도서발행부수 증가를 보였다. 2011년 들어서는 어학이나 역사 분야의 발행부수는 감소했으나 철학 분야는 여전히 9% 가까이 증가했다. 2013년 상반기까지 철학분야의 신간 발행종수나 발행부수는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2010년 <정의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철학이 필요한 시간>, <책은 도끼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 인문분야의 도서들이 선전했다. <논어>같은 고전도 판매고가 늘어나고 있다. 1981년 교보문고 개점 이래로 인문분야 도서가 종합판매순위 1위를 차지한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 가 처음이라고 한다. <마시멜로 이야기>, <시크릿>, <이기는 법> 등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자기계발서가 서점가를 휩쓸었던 것과는 퍽 대조적이다.

기업들도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직원의 선발과 육성에 열을 올리는 분위기다. CJ E&M,  포스코, 롯데백화점 등의 다양한 기업에서 사내 인문학 강의를 강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삼성에서는 ‘삼성 컨버전스 소프트웨어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인문학 전공자를 채용하고 소프트웨어에 대한 교육을 시켜 ‘통합형 인재’를 키우는 전형을 도입했다. 또 국민은행의 2013년 상반기 채용 심층면접은 28권의 인문학 도서를 읽고 토론하는 파격적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인문학이 열풍을 일으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의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유명 저자를 초빙한 강연은 물론 인터넷이나 팟캐스트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강의도 많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인문학이 취업의 열쇠를 쥐는 것 같이 되어 취업 준비생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와 스터디 모임도 생기는 추세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 한물 간 자기계발서의 대신 <논어>나 <손자병법> 등 동양 고전에서 처세술과 삶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라디오 시사고전’의 진행자로 유명한 박재희 민족문화컨텐츠연구원 원장은 국내 웬만한 CEO들의 ‘스승’이라 불리울 정도로 많은 강연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반쪽 짜리 인문학

 

인문학이 유행하게 된 데는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아이폰의 등장일 것으로 보인다. ‘기술에 인문학의 감성을 더했다’ 내세우는 애플과 스티브 잡스가 전세계를 휩쓰는 성공을 거두면서 인문학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잡스 등장 이전까지는 고리타분하고, 돈 안 되는 학문이라며 악담을 퍼붓던 사람들이,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이후에는 영감을 불어넣어 성공을 약속하는 학문으로 떠받들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취업, 승진, 돈벌이, 힐링 같은 것들이 인문학의 탈을 쓰고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하며 진리를 마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학에서 정리되고 있다. 머지않아 통찰과 반성의 힘을 완전히 잃어버린 현실을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문지현 기자/중앙
<jeehyunm@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