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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하고 쿨하게. 잘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숨은 보물 찾기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단골 식당에서 늘 먹던 메뉴가 아니라, 처음 주문해 본 음식에서 기막힌 맛을 찾아내는 것은 일상에서 소소하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독자에게 그런 신선한 기쁨을 준다. ‘상실의 시대’ 등의 소설로 더 잘 알려진 작가 하루키. 그러나 그는 세간의 반응이 어떻든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도 여러 권 선보이고 있다. 그의 에세이는 이채로운 매력을 갖고 있다. 그 중 ‘이게 하루키가 쓴 글이야?’라며 자문하게 되는, 가장 의외의 면모를 지닌 책 3권을 추천한다.

 

1. 하루키식 병맛열전
-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다소나마 정확하게 문장화해보려 함이다. 리얼하고 쿨하게. 잘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소개할 세 책 중 가장 웃기다. 하루키 특유의 어처구니없는 유머를 만끽할 수 있다. 삽화들도 담백하면서 똑같이 어처구니없지만, 위트 있어 참신하다. 제목처럼 내용은 시시껄렁한 얘기들이다. 이게 하루키 에세이의 매력. ‘이런 시시한 얘기 따위 나도 쓰겠네’ 라고 무심하게 시작했다가 끝까지 읽게 된다. 그리고는 읽을수록 일상에서 쉽사리 지나치는 일들에 대한 하루키의 특이한 통찰력에 놀라게 된다. 또한, 자기 취향의 사물을 묘사할 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매력 있게 꾸며낸다. 특히 음식에 관한 부분을 읽고 있자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라도 먹고 싶게 만들 정도로 탁월하다. 무신경한 느낌의 글들이라, 복잡한 일로 머리 아플 때 일단 현실도피를 위해 찾게 되는 묘미가 있다.

 

2. 그리스, 터키 기행문
- “우천염천(雨天炎天)”

‘소련’, ‘서울 올림픽’ 같은 구시대의 단어들이 난무하다. 언제 써진 책인지 확인하지 않고 무심코 읽다가 낯선 단어들과 조우하게 된다. 이 책은 1988년에 그리스와 터키를 여행하고 나서 쓴 기행문이다. 그리스에선 그리스정교의 성지인 ‘아토스 반도’를 , 터키에선 3주간 4륜구동차를 타고 외곽을 따라 여행한다. ‘성지’, ‘4륜구동’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절대 편한 행로는 아니다. 따라서 안내서 목적으로 쓴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아토스 반도는 세속의 규칙이 아닌, 종교적 원칙의 지배를 받는 땅이다. 자급자족의 세계이며 교통기관은 없다. 관광업자들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채 보존된 맨땅. 그런 점에 이끌려 아토스로 간 하루키는 그곳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험한 지형, 그리고 수도원에서 제공받는 맛없는 식사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읽고 있자면 이거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맨땅에 헤딩하기’로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도대체 이런 뻘 짓을 왜 글로 썼을까 싶다가 하루키의 악전고투에 동화되어 다음 여정에서 벌어지는 삽질과 난관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이렇게 독특한 기행담에 가랑비에 옷 젖듯 심취해갈 때 등장하는 결정타. “모든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제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 이상한 것, 기막힌 것들을 만날 수 있다.” 이쯤 되면 불과 몇 분 전, 고생하며 여행하는 하루키를 비웃었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아토스 반도와 터키의 지도를 살피며 홀연히 떠나고 싶어진다.

 

3. 마라토너 하루키
- “달리기를 말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책의 표지엔 한 남자의 뒷모습이 있다. 웃통을 벗은 채 러닝슈즈를 신고 달리고 있는 뒷모습. 전신이 구릿빛이고 근육이 붙은 매끈한 몸매다. 책을 읽다보면 이 구릿빛 남자는 다름 아닌 하루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가 마라토너라고는 하지만 ‘노르웨이의 숲’을 쓴 작가라고 상상할 수 있을만한 등짝이 아닌 것이다. 고독한 주인공이 주로 등장하는 하루키 소설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그가 소설을 쓰면서 착실하게 마라톤을 즐기고 풀코스를 25회나 완주했다는 사실에 다소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하루키의 화려한 경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트라이애슬론 완주 경력도 여러 번 가지고 있다. 밤새 맥주를 마신 뒤 숙취를 이기며 소설을 쓸 것만 같았던 그는 알고 보니 매끈한 등짝을 가진 철인이었던 것이다. 책은 기본적으로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에 대한 성찰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격렬한 운동을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는 구절도 많다. 그러나 가볍게 읽히는 다른 에세이들과는 달리 조금 무게감이 있다. 이 책이 30년간 마라토너이자 소설가로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자 하는 회고록인 관계로 꽤나 진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무언가를 업(業)으로 삼고 있는 한 인간의 끈기를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업을 꾸준히 일궈온 ‘인간’ 하루키와의 대면이다.

 

최혜란 기자/조선
<hr0616@e-medne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