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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의사(醫師) 7인, 그들은 의사(義士)였다

그들이 시대에 굴하지 않은 모습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1908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면허 수료식이 열렸다. 최초의 한국인 의사가 생기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때 의사 면허를 받은 사람들은 각각 홍종은, 김필순, 홍석후, 박서양, 김희영, 주현칙, 신창희 총 7명이었다. 그런데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의 교수이자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온 애비슨의 가르침을 받은 7명의 제자들은 일본의 조선침략 과정 속에서 독립 투사로 변신하게 된다. 지금부터 그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활약상을 공개해보고자 한다.

홍종은_ 의사 면허 1호, 애비슨의 오른팔

1906년 그는 관립의학교를 3회로 졸업하였지만 더 많은 실력을 갈고 닦기 위해서 세브란스의학교에 편입하였다. 그는 세브란스의학교 재학 중 애비슨의 역점 사업 중 하나였던 의학 용어집 번역을 도왔다. 실제로 그는 김필순과 함께 의학교과서 편찬에 힘써 ‘피부법 진단 치료법 단’(1907), ‘무씨 산과학’(1908)을 번역하고 출판하였다. 졸업 후에는 모교에 남아서 후학양성에 힘썼다. 그 뒤 1909년 그는 학교를 떠나 동기인 신창희와 함께 구세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았고, 동기생인 신창희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김필순_ 의사 면허 2호, 만주의 천사

애비슨이 그의 능력을 인정해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그러나 신민회 회원이었던 김필순은 1911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일제의 손길을 피해 중국으로 향했다. 김필순은 만주 땅에 많은 우리 동포들이 있지만 작은 병원 하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지금의 중국 류하 지방에서 환자들을 돌봤다. 하지만 그는 자꾸 커져만 가는 일제의 세력을 피해서 더 북쪽으로 향했고 지금의 치치하얼에 정착해서 북제진료소(북쪽의 제중원이라는 뜻)를 개소했다. 이곳에서 동포들을 돌보면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힘을 쏟았던 그는 1919년에 일본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독살 당하고 말았다.

홍석후_ 의사 면허 3호,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

홍석후는 홍종은과 마찬가지로 관립의학교 3회 졸업생이었다. 그 역시 더 많은 경험을 위해 세브란스의학교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그는 학교에 남아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는 안과, 이비인후과를 담당하였고, 세브란스의학교의 초대 동창회장의 자리까지 역임하였다. 그 역시도 독립 운동에 대한 갈망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몸이 불편한 노부모가 있었다. 결국 그는 노부모를 봉양하기로 결정해 망명을 포기했고 그 대신에 실력 있는 의사들을 길러내어 우리나라의 의료발전에 커다란 이바지를 하였다.

박서양_ 의사 면허 4호,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교수가 되다

몇 년전 방영했던 드라마 제중원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티프로 유명한 박서양은 실제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신분제 철폐와 맞물려 백정의 신분을 벗은 박서양은 애비슨에 의해 의사로 거듭났다. 그는 졸업 후 모교의 교수로 후진 양성에 열중했다. 그는 화학과 해부학 등을 가르쳤다. 그런데 1918년 경에 돌연 교수직을 사임하고 중국 만주지방의 용정으로 망명했다. 그는 대한국민회의 군의로 활동하면서 독립군의 활동을 지원했으며, 용정지방에 구세의원이라는 의원을 개원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 음지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다.
김희영_ 의사 면허 5호, 빼어난 외과의사

세브란스의학교 졸업 후 그는 약물학을 후학들에게 가르쳤으며, 1909년 콜레라가 유행했을 당시에 적극적인 방역활동으로 백성들의 건강을 위해 힘썼다. 김희영은 독일 의사들로부터 외과분야를 배웠는데, 이는 그가 우리나라 외과술의 선구자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를 떠난 후에는 병원을 개원하여 전국 여러 곳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는 실력이 빼어나서  외과 환자들이 그에게서 집도받기를 무척 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김희영은 1919년 3.1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는 그 때 심한 고문을 받고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현칙_ 의사 면허 6호, 끝내 광복을 맞지 못하고…

김필순과 함께 신민회 회원이었던 주현칙은 동기생들 중 유일하게 졸업 직후 학교에 남지 않고 선천지역에서 개원하였다. 그는 개원을 하면서도 비밀리에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며 모진 고문을 받았다. 국내에서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주현칙은 1921년 상해로 망명했다. 그 곳에서 그의 후배 신현창과 함께 삼일의원을 개원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을 위해 힘을 다했다. 1927년에 다시 귀국한 주현칙은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36년에는 동우회 사건으로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미국 선교사를 통해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것이 드러났다. 이 일로 일제에 검거당하여 다시 한 번 심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광복을 맞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신창희_ 의사 면허 7호, 동포들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다

졸업 후 신창희는 후진 양성을 위해서 힘썼지만 1910년에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기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로 선택했다. 1917년 경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지방)에 평산의원을 개원하여 항일 운동을 지속해나갔다. 그리고 상해임시정부의 교통국 요원으로 독립군에게 자금을 조달하는데 진력하기도 했다. 또한 1922년에는 일제에 의해서 신창희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의로 파악된 기록이 있으며, 상해에서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적십자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동몽골지역으로 가서 그 곳에 이주한 많은 우리 동포들에 대한 무료진료를 실시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한 진료를 강행하여 폐렴에 걸려 1926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상으로 자신의 한 몸을 다 바쳐 우리나라의 주권 회복과 우리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힘썼던 대한민국 최초의 의사 7인의 삶을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앞으로 의사가 될 많은 의대생들이 이 7인의 삶을 통해서 자신들이 직면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 한 번 쯤은 고민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강상준 기자/서남
<myidealis@e-mednew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