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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행복, 50페이지의 만족감

 

학업과 연애, 동아리활동까지 3단 콤보에 지친 당신, 한숨 좀 돌려볼까요

 

2만 의대생들의 생활패턴은 가지각색이다. 일단 놀고 시험기간이 되면 잠과는 담을 쌓고 벼락치기를 하는 사람, 매일매일 그 날 진도 복습하며 열람실을 지키는 사람, 동아리 활동 혹은 연애에 모든 것을 걸고 다른 건 다 뒷전이 되어 버린 사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서 더 스트레스 받는 사람 등. 하지만 그 모두가 머리에 꾸깃꾸깃 집어넣어야 할 방대한 양의 의학지식과 여기저기서 치고 올라오는 무서운 기세의 동기들에 압도당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것은 마찬가지일 터. 학기의 약 1/3이 지난 지금,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있으니 이제 한숨은 그만 쉬고 한 권의 가벼운 책과 함께 조용히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2011년 6월을 기준으로 서울지역 인구 평균 독서량은 1년에 4.1권(인터파크 글로벌 수치)이다. 의대생의 1년 평균 독서량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보다 적은 양일 듯하다. 눈 코 뜰 새 없는 학기 중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일 터. 그래서 떠오른 생각은 딱 50페이지! 약지손톱보다 짧은 두께와 초경량의 미(美)를 자랑하는 책들이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었다. 가벼운 그 50페이지가 내면에 안겨줄 새로운 세계관과 만족감을 생각해보면 사치라기 보단 소소한 행복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쳇바퀴 같은 일상을 탈피해 신비로운 고고학의 세계로


첫 번째로 소개할 책은 사실 조금 두께가 있긴 하지만 전체 페이지 수의 절반 정도가 구미를 돋우는 흥미로운 사진들로 가득 차 있어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발칙한 고고학’이라는 책이다. 인류학, 역사학 등을 연구해 온 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후즈펑이 쓴 이 책은 우선 다른 모든 잡념을 버리고 펼치는 게 좋다. 책에 묘사된 장엄하고 도도하게 펼쳐진 유적들을 상상하며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해발 3000m 고산지대의 밀림 속에 1000년 동안 잠들어있던 사원에서 사파리 모자를 쓴 채 우뚝 서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 책은 고고학에 대한 통념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려 하기 보다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시선에서 펼친 가설들을 소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타지마할이 실은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이나, 고대 잉카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페루의 비스코 만에 있는 커다란 도안이 하늘을 나는 자들을 위한 표식이라고 주장하는 가설 등이다. 어찌 보면 억지스럽고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 내기까지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가진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과 발굴, 연구 활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생이란 뭘까. 시크한 철학자가 말하는 인생이야기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말이 담긴 인생지침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렇게 시크하게 툭툭 내뱉듯 조언해주는 철학자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뤼디거 사프란스키가 엮은 ‘니체, 인생을 말하다’는 독일의 생(生)철학자의 대표 주자이자, 니힐리즘을 주장한 니체의 시크하고 직설적인 독설이 담긴 책이다. 마치 폐쇄적인 한국사회를 꼬집는 듯한 한 문단을 옮겨보자면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감이 만연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획일화되며, 모든 차이를 더욱 더 단호하게 비도덕적이라 느끼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인류의 모래밭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모두가 아주 똑같고, 아주 작으며, 아무 모짐이 없이, 아주 친화적이고, 아주 지루함을 준다. 기독교와 민주주의는 인류를 모래밭에 이르는 도정에서 이제까지 가장 멀리 날라다주었다.’ 하지만 그의 독설은 마치 겉은 딱딱하지만 한 입 베어 물면 속살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게트 같다. ‘우리는 친구였지만 지금은 서로 낯선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좋은 일이며 우리는 그것을 마치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은폐하고 모호하게 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각각의 목적지와 경로를 갖고 있는 두 척의 배이다.’ 아직 이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당신이라면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문장이 될 수도 있겠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니체가 폭군 같은 철학자이기 전에 감수성 풍부한 시인이었다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 안철수가 들려주는 원칙에 입각한 그의 삶

 

원칙에 입각한 삶을 사는 인물은 후대에도 널리 그리고 오래 기억된다. 기원전의 예수와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가 그렇듯이 말이다. 여기 또 한명의 자기만의 원칙을 고수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 대학원 원장인 안철수가 그 사람이다. 세 번째로 소개할 책은 그가 서울대학교 관악초청강연에 초청되어 강의한 내용이 담긴 ‘경영의 원칙’이다. 강연 내용을 관통하는 그의 인생관을 아우르는 대목은 이 구절이다. “안연구소를 경영하면서 세 가지를 이루려고 노력했어요, 첫째, 한국에서도 소프트웨어 사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 둘째, 한국적인 상황에서도 정직하게 사업을 하더라도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셋째, 공익과 이윤추구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양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그의 강연은 독자로 하여금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의 세포들이 자라나도록 이끌어 주는 듯하다. 책은 강연 파트에 이어서 패널들과의 대담 그리고 학생들과의 나눈 꾸밈없는 대화가 실려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봄바람이 밀려오는 4월의 중순, 모든 중압감에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만을 위한 시간을 가볍고도 만족스러운 50페이지와 함께 누려보는 것도 일상의 좋은 쉼표가 되어줄 것이다.  

 

이선민 기자/을지
<god0763@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