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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처, 성산 장기려

 

“나를 본 한 할머니는 청진기만 대면 병이 낫는 줄 알고 가슴에 청진기를 한번만 대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치료비가 없어 평생 의사 얼굴 한 번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 부산 복음 병원장  40년, 서울의대 교수직 역임, 김일성 수술집도, 우리나라 최초 간암 대량 절제 수술성공. 당대 최고의 외과 전문의였지만, 8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직 가난한 사람들만 바라보며 산 성산 장기려 선생님. 의료인이 자신의 이득만을 쫓는다고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은 이때, <한국 의료 역사 속의 인물취재>를 통해, 성산 장기려 선생님의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의사가 되다

 

1911년에 태어나 조부와 아버지의 교육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란 그는, 1928년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경성의전(서울의대 모태)에 입학했다. 졸업 후 스승 백인제 박사의 조교로 학업에 매진,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경성의전의 교수자리를 제안 받았으나, 서울이 아닌 시골로 내려가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겠다는 결심을 잊지 않고, 평양 기홀 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천막 무료 복음병원을 세우다

 

194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을 왔을 때, 그가 본 것은 전쟁 통에 끼니조차 잇기 힘들어 죽을병에 걸려도 참고 살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돕기 위해 1951년 부산에서 UN 민사원조처의 원조를 받아 천막에서 무료 병원을 시작했다. 원조라고하나 50인분의 약값만을 지원받았을 뿐, 모든 시설과 인력은 스스로 충당해야 했다. 군용 천막 안에 차려진 간이 병원, 의사는 장기려 선생 한 명, 직접 나무로 만든 수술대 위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낮에는 햇빛으로, 밤에는 촛불을 켜고 응급수술을 했다. 이를 본 미국의사가 “마치 동물을 수술하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 속에서 그는 혼자서 하루에 100명도 넘는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국내 최초 간암 대량 절제 수술 성공

 

전쟁이 끝나고, 모교인 서울의대에서 교수로 오기를 청했으나, 복음병원의 일을 그만둘 수 없어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강의와 진료를 계속 하다, 결국 부산에 자리를 잡게 된다. 부산대학에 외과를 신설, 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대량 절제수술은 불가능 하다는 당시 인식을 깨고, 1959년 2월 24일 국내 최초로 인체 간암에 대한 간의 대량 절제 수술을 실시해 성공을 거두었다.

 

복음 병원장이 되다

 

군용 천막에서 시작한 무료 병원은 미국 선교사와 원조 기관의 도움으로 제대로 된 병원으로 자리 잡았으나, 병원운영을 위해 조금씩 병원비를 걷게 되며 병원비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는 환자들이 생겨났다. 병원비를 구하고 구하다 마지막으로 찾는 곳은 원장실. 장기려 원장은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일할 기회를 주든지, 그냥 퇴원하고 돈이 생기면 갚으라고 보내주든지, 그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납처리하곤 했다.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자체의 운영도 어려워지자, 결국 병원 진료 부장회의에서는 무료 환자에 대한 모든 것은 원장 임의로 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그러자 어려운 환자들에게 그가 했던 말. “내가 밤에 뒷문을 살짝 열어 놓을 테니 몰래 도망가시오.”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써준 그이 처방전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장기려 원장은 항상 환자 편에 섰던 병원장이었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설립

 

의료보험이 있어 아프면 병원에 쉽게 갈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병원의 문턱은 너무나도 높았다. 이에 1968년 장기려 박사는 뜻잇는 사람들과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다. 시작은 어려웠다. 월 보험료는 당시 100원의 담뱃값만도 못한 60원에 불과했다. 회원수는 고작 1000명 수준이었고 그마저도 고가의 약을 무료로 타가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환자를 대상으로 장사를 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시작된 의료보험은 1989년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 때 까지 20만 영세민 조합원의 의료수혜를 책임졌다. 의료 보험 정착 후에도 그는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다.

 

“의사는 진실과 동정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면 죽을 때까지 남에게 필요한 존재로 일할 수 있다.”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성산 장기려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이다. 장기려 선생님의 일대기와 그 말씀은 많은 의대생들이 나아갈 길에 등불이 되어 줄 것이다.
 
박상아 기자/을지
<ann1208@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