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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최우수

84호(2011.12.12)/문예공모전 2012. 1. 9. 17:17 Posted by mednews

(수필부문) 최우수
명쾌한 진단
경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2학년 박솔희

불안 장애, 강박 장애, 망상장애. 너무 아파서 점심시간에 끼니도 거른 채 찾아간 병원에서 20분 만에 받은 내 병의 진단이었다. 나는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씩씩거리며 병원을 나섰다. 문이라도 한 번 ‘팡’ 하고 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편으로는 억울함이 밀려와서 눈 밑에 차올랐다. 못 다한 나 자신에 대한 변호의 말들이 입안에서 우글우글 거렸다. 이야기의 시작은 넉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시작됐어.”

찌르르한 느낌이 가늘게 나타나나 싶더니 어느 새 왼쪽 위아래 턱 모두 누구에게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얼얼해져왔다. 일단 통증이 시작 되면 약 5분에서 10분정도는 얼굴의 아랫부분이 너무나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한 손으로 턱을 감싸 쥔 채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괜찮아지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처음으로 아팠던 것은 1월 어느 날이었다. 4학년 선배들의 국가고시 응원을 위해 깜깜한 새벽부터 시험장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추위에 떨었던 때이다. 모자, 마스크, 내의로 중무장을 하고 온 몸에 일회용 핫팩까지 붙였는데도 너무 추워서 발가락 끝마디부터 서서히 감각이 무뎌져 왔다. 선배들이 모두 입장하고 응원을 담당한 1학년들끼리 기념사진도 찍고 드디어 끝났구나! 얼른 집에 가야지 하고 차에 올라타 히터 바람에 언 몸을 녹이자 다시 몸에 따뜻한 피가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와 거의 동시에 이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픔이 내 왼쪽 턱 부근에 느껴졌다. 그 후로 괜찮아 지겠지 괜찮아 지겠지 하고 몇 번 넘겼더니 통증이 오는 건 더욱 잦아졌고 범위도 점점 넓어져서 이제는 왼쪽 귀 까지 먹먹한 지경이 되었다. 도대체 이게 뭐람?
 
나와 같은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 또는 이미 그 공부를 거쳐 의사로 활동하고 계시는 분이라면 이 글을 읽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내부 스위치가 켜졌을 것이다. 분명 머릿속에는 어떠한 알고리즘이 지금 막 순차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중일 테다. 나도 그랬다. 본과 2학년이 되어서 한창 임상 질병들에 대해 배우고, 증례에 대해 토의하는 수업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스스로 자신의 병력을 정리하고 가능한 질병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고 있었다. 아 나도 제법 의사가 되어가는구나 싶었다. 가장 유력한 것은 턱관절 질환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왼쪽 턱관절이 안 좋아서 이제는 입을 벌렸다 닫을 때 ‘딱’ 하는 소리가 났다. 게다가 얼마 전에 치과의사 한 분을 사석에서 만나 뵐 일이 있어서 물어보았더니 꼭 추웠다가 따뜻해질 때 아프고 통증이 관절부터 시작되는 게 턱관절 질환의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넉 달 동안 이렇게 나름 유추도 하고 조언도 들어서 턱관절 클리닉에 몇 번 다녔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심해졌다. 그래서 결국 단골 치과를 찾아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예전 기록을 살펴보니 관절 때문이 아니라 이전에 경과를 지켜보자고 그냥 두었던 치신경의 손상이 점점 더 진행되어 문제를 일으킨 거라는 의외의 결과였다. 신경치료를 통해 신경을 제거해야한다는 말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치료를 받고나면 이가 푸르스름하게 변색되므로 내 이에 사기를 덧씌워야 한다는 것도 걱정되었다. 어쨌건 나는 신경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치통으로 넉 달 동안이나 고생을 했던 나는 예민할 데로 예민해져 있었다. 시험을 이틀 앞두고 있는데 이제 막 치료를 시작한 부위가 퉁퉁 붓고, 예전보다 통증이 훨씬 심해진 것 같았고, 나는 막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에게 화를 내야할 지 몰랐다. 그리고 “딸칵”, 내부의 스위치는 또 켜졌다. 신경 치료하는 부위가 덧나서 염증반응이 일어난 거 아닐까? 아니면 애초에 턱관절이 문제였던건가? 아니 염증반응이 더 맞는 거 같은데. 생각은 점점 더 비과학적으로 변해갔다. 1년 전에 잇몸을 절개하고 사랑니를 뽑았던 자리에 염증반응이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머릿속 알고리즘은 점점 더 가지를 쳤고 걱정으로 내 두뇌를 조각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점심도 먹지 않고 학교 앞에 눈에 보이는 한 치과로 달려갔다. 그렇게 받은 진단명이 불안, 강박, 망상 장애였다. 치과의사 선생님의 눈에 나는 인터넷 자료를 강박적으로 검색하고 마음대로 병에 대해 생각하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의사인 양 떠들어대는 영락없는 건강 염려증 환자였던 것이다.   

태어나서 그런 진료는 정말 처음 받아봤다. 머리가 희끗하신 의사선생님이셨는데 내가 한 마디 할 때마다 가차 없이 비난하셨다. 내가 엑스레이 사진에서 아픈 부위를 짚으며 여기에 염증소견이 있는 게 아니냐고 했더니, 거 보라며 사랑니를 뽑은 부위는 분명 잘 아물었고 신경치료 하고 있는 부분은 여기인데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허참 요즘 사람들은 없는 병도 만들어. 마음을 편안 하게 먹을 줄 알아야지.” 상상 병이라니 마음을 고쳐먹으라니 하도 몰아세우셔서 당황한 나머지 증상을 설명하다가 나도 모르게 아픈 반대쪽 턱을 가리켰다. 그러자 턱을 짚기가 무섭게 “아까는 이쪽이라더니 왜 반대쪽을 짚누?”하고 나무라셨다. 순식간에 아프지도 않은 병을 만들어내서 어느 쪽인지 분간도 못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 억울해서 무어라 설명을 하려들어도 금방 꼬리를 내려야 했다. 의대생인지라 마치 직업병처럼 조금만 아파도 나도 모르게 증상을 분석하고 진단하게 된다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또 폭풍 같은 비난을 들을까봐 가만히 있었다. 설교의 마무리는 나의 예민한 성격을 고칠 필요가 있다는 얘기로 끝났다.

병원을 내려가는 계단 옆에 걸려있는 거울을 들여다보니 그러지 않아도 작은 내 입술이 한층 더 예민하게 앙다물고 있는 것 같았다. 화가 난 상태였지만 한편으로는 눈빛도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자세도 움츠러든 게 정말 선생님 말대로 내가 너무 심하게 걱정한 거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통증은 하루 이틀 지나 잦아들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마치 중고등학교 때 할아버지 선생님께 꾸중 듣는 것 같았던 그 날의 진료가 한편으로는 내가 넉 달간 거쳤던 어느 병원보다도 속 시원하게 치료를 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진료를 받는 내내 화가 솟구치고 어안이 벙벙해서 진료실을 박차고 나왔지만 마음가짐을 바꿔보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은 내 옷깃을 붙잡고 따라왔다. 학교생활 중에 작은 일이 나를 걱정스럽게 만들라치면 그 말이 떠올랐고 아픈 이가 낫듯 걱정이 사그라졌다. 그리고 당시 배우고 있던 정신과 수업에서 ‘건강 염려증’ 환자에 대한 내용이 나왔을 때 기막히게도 그 날 내가 했던 말이랑 행동과 일치해서 혼자 속으로 마구 웃었다.

그간의 병원 순례는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할 것인가?’ 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끔 했다. 이번에 앓은 치통 덕에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환자의 입장에 서 본 셈이었다.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단골 치과에서의 진료가 가장 좋았다. 의사 선생님은 별 말씀은 안하셨지만 내가 호소하는 증상들에 대해 묵묵히 들어주시고는 간간히 내가 느끼는 통증에 대해 공감을 해 주시곤 했다. 비록 호들갑을 떨며 얕은 의학지식을 동원해 증상을 호소하는 내 모습이 건강염려증 환자처럼 보였을지라도 말이다. “마이 시리지예?” 한마디에 넉 달 간의 치통 중 한 달치는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불편해 했던 통증을 해결해 주었다. 턱관절 클리닉에서처럼 값비싼 교정기를 구입하는 일도 없이 말이다. 환자가 호소하는 불편함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했기에 정확한 원인을 짚어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감동하긴 이르다. 5주 가까이 신경치료를 받으러 통원하는 내내 나는 간호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곤 했었다. “사기로 이를 덮어씌우면 보기 흉하나요?” 신경치료를 하면 꼭 해야 하는 필수 코스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고 20대의 창창한 나이에 의치를 한 할머니 같아 보일까 걱정이었다. 치료중인 이가 ‘앞니’였기 때문에 미용에 더욱 신경 쓰였다. 그런데 치료 마지막 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치과를 찾은 내게 간호사가 말했다. “선생님이 사기로 덮어씌우는 건 일단 미뤄두자고 하시네요. 변색이 되면 그 때 해도 늦지 않으니 나중에 오세요.” 다른 병원이었다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10년 동안 단골로 다니면서 선생님과 안부 한 번 제대로 주고받은 적 없을 정도로 말이 없으신 분인데, 이렇게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배려가 환자와 의사 사이의 대화를 대신 했다. 물론 간호사를 통해 내가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셨겠지만, 내 머릿속에는 다른 환자를 치료하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는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상상 되었다.

‘명쾌한 진단을 내리는 의사가 되고 싶다.’ 는 게 내가 치통으로 고생을 하고, 병원 세 곳을 전전하며 극도의 예민함으로 치닫다가 마지막에 불안장애 망상장애 강박장애를 진단받고 정신이 번쩍 든 뒤 한 생각이다. 비록 일반 병원이 아닌 ‘치과’에서 경험하고 느낀 일들이지만, 의사와 환자의 관계라는 면에서는 앞으로 내가 일하며 겪게 될 일들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명쾌한 진단의 알고리즘은 다른 게 아니라 환자가 가장 불편해하는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환자가 되어 아파보니 알 것 같았다. 현재 내가 가장 괴로워하는 것 ‘이것’을 의사가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컸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친절보다 몇 곱절 값진 ‘배려’, 환자의 걱정스런 말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만화 주인공처럼 자유자재로 커질 수 있는 귀.

단골 의사 선생님도 명쾌한 진단을 하셨지만, 점심시간에 찾아갔다가 꾸지람을 들은 선생님도 칼 같은 진단을 하셨다. 그 때 나는 분명, 치아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쳐있고 곤두서 있었던 게 가장 큰 문제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덧붙이자면 환자가 자각하지 못하는 문제점까지도 꿰뚫어볼 수 있는 매서운 눈은 물론이거니와, 필요할 땐 따끔하게 호통도 칠 줄 아는 능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글을 마무리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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