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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우수

84호(2011.12.12)/문예공모전 2012. 1. 9. 17:16 Posted by mednews

(수필부문) 우수
마음
차의과학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2학년 손호영

해부학 실습실은 병원 지하 4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긴장감을 잊어보려 동기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려 계단을 내려가 해부학 실습실 문 앞에 다다랐다. 그곳에서는 축축한 포르말린 냄새가 느껴졌다. 다들 하나씩 챙겨온 낡은 옷을 몸에 걸치고, 그 위에 헌 수술복을 착용했다. 그리고 실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섯 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테이블 위에 검은 천으로 싸여있는 카데바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수술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조별로 테이블 주위에 둘러섰다.
교수님과 목사님께서 시신을 기증해주신 분에 대한 감사의 의식을 시작하셨다. 축도와 묵념이 끝나고, 카데바를 싸고 있던 검은 천을 벗겨냈다. 그 안에는 커다란 비닐에 싸여있는 시신 한 구가 있었다. 나는 조원들과 힘을 합쳐 카데바를 커다란 비닐 안에서 꺼냈다. 건장한 중년 여성으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섞여 있었다. 피부는 어두운 색이었고, 방부액에 충분히 젖어 있어서 약간 불어 있었다. 나는 시신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적도, 직접 만져본 적도 없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명이 꺼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은 해보았지만, 실체로서의 죽음을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만지면서, 나는 카데바를 비인격적 개체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것을 내 손으로 만지고, 자르고, 벗겨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를 벗겨내는 일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카데바는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스테인리스 테이블과 마찬가지로 무생물일 뿐이니까 피부를 벗겨낸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첫 실습은 등의 피부를 벗겨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 조는 카데바를 뒤집어 놓고, 메스로 피부에 작은 십자모양을 새긴 후, 그 중 한 부분을 핀셋으로 잡고 메스로 피부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피부를 벗겨나갈수록 그 아래에서 노란 인간의 지방조직이 드러났다. 처음 잡는 메스, 생각보다 질긴 피부, 인간 지방의 질척한 냄새, 그리고 처음 만져보는 카데바는 어쩐지 현실에서 현실감이라는 요소를 조금은 덜어냈다. 우리 조의 카데바는 그렇게 피부가 상당부분 벗겨진 채로 차가운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첫 실습 후,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카데바를 철저하게 비인격적 개체로 받아들인다면, 실습을 시작하기 전에 했던 감사의식과 실습실 곳곳에 붙여있는 ‘시신을 기증해 주신 분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말자’라는 글귀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것들은 결국 카데바가 인격적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실습시간 동안 가졌던 ‘비인격적 카데바’의 상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만약 ‘인격적 카데바’의 상을 받아들인다면, 도저히 실습 시간에 카데바의 피부를 벗겨내고, 근육을 자르고, 혈관과 신경을 분리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카데바를 비인격적인 개체로 받아들일 때만 가능한 행위였다. 이것은 해부학 실습이 진행되는 내내 나의 화두였다.
그렇게 등, 팔, 가슴, 머리, 배, 내장, 골반, 다리까지 한 학기 동안 정신 없이 실습이 진행되었다.  해부학뿐만이 아니었다. 생화학, 생리학, 조직학 등 공부해야 할 내용은 산더미 같았고, 시험은 매주 월요일마다 있는데다 해부학 실습이 정규 수업시간에 포함되지 않아, 수업이 끝난 밤이나 주말에 실습을 해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정신이 없었다. 실습 평가가 있는 날을 포함하여 일주일에 두세 번씩 카데바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나 역시 카데바와 함께 지내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카데바를 ‘우리 할머니’라고 부르며, 골고루 방부액을 뿌리고 노출된 피부에는 정성스레 비닐랩을 감아 좋은 상태로 보존을 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시신은 생명이 꺼져버린 무생물일 뿐이다. 그것은 고인이 남겨놓고 떠난 것이긴 하지만, 고인 그 자체는 아니다. 시신을 존중하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고인의 정신과 의지를 존중하는 것의 연장선 상에 있다. 즉, 우리가 카데바라는 비인격적 개체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존중하며 대해야 하는 것은 고인의 시신을 기증하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그 의지가 육신에 생명이 떠난 후에도 남아 의학도들에게 소중한 인체 해부 실습의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비인격적 개체에 인격적인 개념이 덧씌워졌고, 나는 비로소 카데바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해부학이 종강하는 날, 해부학 땡시험이 끝나고 이곳저곳 분해되고 해체되어 인체의 구조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카데바가 스테인리스 스틸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조의 카데바를 정성스럽게 정리했다. 그리고 시신에서 나온 모든 것들을 처음의 커다란 비닐에 넣고, 그것을 시신 보관용 냉장고에 옮겨 넣었다. 냉장고에 카데바가 들어가고, 역시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육중한 문이 닫혔다. 그 때 나는 세상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듯한 기분으로 한 학기 동안의 실습을 돌이켜 보았다. 내게 카데바는 한 학기 동안 인체의 구조를 배우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구조물 하나하나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존재였다. 강의를 통해 배운 내용을 하나하나 해체해 가면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었다. 나는 시신을 기증해주신 분에 대해 큰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이젠 고인의 숨결이 더 이상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 분이 세상에 남기고 간, 그리고 의학교육을 위해 기증해 주신 그 육신 덕에 나와 내 동기들은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부학 실습이 끝나고 인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지금은 시신에 대한 느낌이 처음 카데바를 마주했을 때와는 많이 변했다. 생명이 꺼져버린 육신은 그저 물건일 뿐이라는 것, 인간은 육체를 통해 이 세상을 살다가 생명이 다하면 그것을 남겨놓고 떠난다는 개념을 깊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해부학 실습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할 때 시신에 대한 두려움 섞인 시선을 마주하게 되면, 처음 해부학 실습실에 들어섰을 때의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그 때는 나도 시신이 두려웠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무척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해부학 실습을 무사히 마치고 시신을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의학을 배우고 의사가 되어가면서 변해가는 마음가짐을 깨닫게 된다. 해부학을 배우면서 카데바라는 비인격적 존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처럼, 임상의학을 배우고 익히면서도 질병이라는 비인격적인 대상을 다루는 동시에 인간을 잊지 않는 그런 의사가 되어 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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