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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사태, 의대는 안녕한가

지난 1월, 카이스트에서 생긴 일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실업계 출신 로봇천재로 입학때 부터 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한 학생의 극단적인 선택. 카이스트 개혁의 실패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한국사회의 총체적 문제를 드러내는 경고음이었다. 하지만 학교당국과 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감만 표명할 뿐 학생들의 정신건강이나 유족들을 위한 대책에는 무관심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연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희생자가 생기더니, 지난 4월엔 네 번째 희생자가 나오고 말았다.
학교당국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혁신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해 부랴부랴 대안마련에 들어갔다. 총장추천 교수 5명과 평교수 5명, 학생 3명으로 구성된 13명의 혁신위원은 한달 여의 회의 끝에, 지난 5월 19일 “차별적 등록금을 없애고 학생들에게 부담을 되는 영어강의를 교양과목에 한해서 줄이겠다.”는 내용의 결론을 발표했다. 총장의 동의하에 학교와 학생이 함께 협의한 사항이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교수와 학생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지난 5월 28일 서남표 총장은 이마저도 “의결사항을 일괄적으로 이사회에 미루겠다”며 즉각적인 시행을 거부했다.

급속한 개혁이 낳은 부산물

카이스트의 내부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어날 사건이 드디어 터졌다는 반응이었다. 올해로 5년째 카이스트 총장을 맡고 있는 서 총장은 취임당시부터 떠들썩한 인물이었다.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 수재, MIT 기계공학과 학과장을 맡으면서 모두가 반대했던 사안을 밀어붙였던 저돌적인 인물.
이런 사람이 카이스트에 와서 어떤 변화를 일구어낼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의 밀어붙이기식의 행보에 걱정스런 반응도 많았다. ‘학교 기숙사가 모자라는 것은 연차초과자 때문이다. 연차초과자가 학교에 남지 못하게 하겠다.’ ‘국민의 세금을 받아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충해서는 안 된다. 일정 수준이하의 성적을 받는 학생들에겐 차별적 등록금을 부과하겠다.’ 그가 총장에 취임한 지 5년,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가장 큰 변화가 뭐냐고요? 무엇보다 학생들 간의 유대가 줄어들었죠. 동아리 활동도 침체되었고요.” 카이스트 학생들은 대부분이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한 친분 쌓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학업 부담 때문에 자유로운 동아리 활동의 기회마저 빼앗겨 버린 것이다.
면학분위기가 좋아진 것도 아니다. 점수를 잘 받아야한다는 압박에 본인 스스로 힘으로 과제를 하지 않고 베끼기에 바쁘며, 심지어 대리시험까지 등장하고 있다. 창의적인 사고의 공간이 되어야할 대학이 점수를 따기 위해 기계처럼 공부하는 고등학교와 다를 바가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친구들과의 거리도 멀어지고 장학금을 받지 못해 부모님과도 소원해진 학생들이 많아진다. 결국 몇몇 학생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성적이 낮은 학생들만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니다. A 30%, B 40%, C 30%라는 엄격한 상대평가제도에서 3.0 이상, 즉 B0 이상을 지키기 위해 공부하는 이들의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두 번째 희생자의 경우 일반고가 아닌 과학고 출신에다 성적까지 좋아서, 그가 죽음을 택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평소에 그를 지켜보았던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그 역시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서남표 총장의 정책에 자주 분노를 표현했었다고 한다.
카이스트 학생의 자살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2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했으나, 서남표 총장의 취임이후 1년에 한번 꼴로 늘어나더니 5년이 지난 2011년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 서 총장의 책임이 없다고 하기 힘들다.

과도한 경쟁사회...
그 속에서 의대생은?

4명의 희생자를 낳은 이번 사태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유는, 이것이 한 학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과도한 경쟁 속에 내몰린 한국 사회를 반영하는 프리즘과 같았기 때문이다. 경쟁으로 인해 지친 사람은 카이스트 학생들 뿐 만이 아니다.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에서부터, 스펙을 쌓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는 취업준비생, 한 등수라도 더 올리기 위해 책상위에 바짝 몸을 붙인 고등학생, 자유롭게 놀 시간을 빼앗긴 채 밤늦게까지 학원을 전전하는 초등학생들까지.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자살률에 있어 2004년 이후 OECD국가 중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20명을 모아놓으면 그 중 1명은 결국 자살로 죽는다.
사실 의과대학내에서의 경쟁은 그 어떤 곳 보다 치열하다. ‘유급’이라는 의대만의 특수한 제도로 인해서 절대적인 점수와는 상관없이 하위 5%의 학생은 무조건 유급시키는 학교도 존재한다. 의대에서 유급을 시행하는 이유는 재수강을 할 수 없는 학사일정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시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서 네임 밸류를 높이기 위한 학교간의 경쟁도 한몫을 한다.

의대생들의 정신건강

이 때문인지 2007년 전국 34개 의과대학 713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신건강실태보고서에선 최근 1개월간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우울증을 경험한 학생이 전체의 2.9%, 최근 1년간 6.5%, 일생동안은 10.3%로 조사되었다. 이것은 일반인 우울증의 2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최근 1개월간 자살사고를 경험한 학생이 4%, 자살계획 0.8%, 자살시도 0.2% 약 30명 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의대생 10명중 한명은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을 경험했다는 의미이며 100명중 4명이 최근 자살을 생각했다는 뜻이다. 우울증의 원인으로는 스트레스가 75%, 가정·성장과정에 대한 불만이 44%, 지나친 경쟁에 따른 피로가 44%, 자아정체성의 혼란이 23.2%였으며, 우울증의 비율은 남자보다 여자에서, 본과 4학년보다는 본과 1학년, 자취나 하숙을 할 경우, 그리고 특례입학자에서 높았다. 우울증을 경험한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학업성적도 좋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의대생에게 우울증이 많은 것은 외국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대협회(AAMC)가 발간한 ‘Academic Medicine 2003-2004 2월호’에 실린 의대 재학생 2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비 의대생 우울증은 10%인데 반해 의대생은 21.2%로 비 의대생에 비해 2배로 높았다.
많은 의대생들이 우울증과 자살사고를 경험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비책은 부실한 상태이다. 전국 41개의 의과대학 중, 우울증 조기 발견 선별검사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는 대학은 7개, 자살예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대학은 단 2군데에 불과하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 바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핫라인이 설치되어 있는 대학 역시 몇 곳밖에 없다. 미국에선 하버드, 예일, 듀크, 미시간 대학 등에서 우울증 조기 발견 프로그램이 널리 활용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의대생들의 우울증 해결책은?

우울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 형성’이다. 카이스트에서 그러한 비극이 일어난 원인은 학생들 간의 유대가 사라진 것과 연관이 없지 않았다. ‘네트워크 형성’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고등학생의 자살률이 오히려 대학생 보다 적다는 사실이다. 고등학교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는 환경이다. 하지만 왜 오히려 자살률이 적을까? 바로, 담임선생님과 반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전홍진 교수는 “대학교 내에선 네트워크 형성이 아주 중요해요. 예를 들어 멘토 교수님을 정한다든지 동아리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필요하겠고, 이를 예과 시절부터 본과로 이어지도록 해야겠죠. 학력 평가 방법도 다양화해서 서로 협력해서 공부하고 발표하는 과정을 평가항목에 넣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네트워크 형성을 증진시키는 것 이외에도, 우울증 조기 발견 선별검사 프로그램, 자살예방 프로그램, 핫라인과 같은 시스템이 전국 의과대학에서도 운영될 수 있게 개개의 의과대학과 의과대학 연합차원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예를 들자면, 하버드 대학은 매주 무작위로 선정된 75명의 학생들과 20분간 전화통화를 하여 학생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적극적인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만약 학생이 심각히 자살을 생각하거나 정신적으로 지쳐있다면 그 학생과 즉시 만난다. 그리고 만약 학생이 만성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원한다면 보통 일주일 내에 그 학생을 만나서 상담을 해 준다. 또한 현재 하버드에서는 정신과전문의 11명을 포함하는 의료진이 학생들의 정신과 상담과 진료를 전담하고 있다.

박민정 기자/성균관
<cindy@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