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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 기자수첩] ... 마법

68호/오피니언 2009. 8. 7. 14:38 Posted by mednews

 ...기자수첩

.. 마법
  


스페인 세비야의 조야한 주택가. 씨에스타(낮잠)를 즐긴 세비야 사람들은 밤이 되면 이런 주택의 옥상에 모인다. 섭씨 40도까지 올라가는 정오에는 죽은 자들의 도시 같았던 세비야가 자정이 되면 탱고와 술로 가득한 풍류의 도시로 변한다. 삼삼오오 옥상에 모인 세비야 사람들은 와인과 레모네이드를 섞은 샹그리아와 세르베자라고 부르는 맥주를 마시며 이 집에서 저 집까지 들릴 정도의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매일 밤, 자정을 훌쩍 넘긴 세비야의 밤은 여전히 부산하다. 주변의 옥상에 비해 한가로운 하숙집의 옥상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에게 한 노인이 다가온다. '저쪽 옥상에 우리 친구들이 있구먼.' 노인은 직접 만든 샹그리아를 가져와서 내게 한 잔을 권한다. '고마워요, 찰스.'

 찰스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하고 이전과는 다른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며 수 천 마일 떨어진 이곳까지 떠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교수시절의 꼬장꼬장함은 남아있다. 때문에 그와 대화할 때에는 단어선택에 유의해야 한다. 가령 'Highway'같은 미국식 영어를 쓰기라도 하면 'That's Yankeesh! it's Motorway!'라고 흥분하며 바로 잡아줄 정도로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다. 하지만 그런 꼬장꼬장함과 다르게 찰스의 집에는 맥북, 아이팟, 구글폰 같은 트렌디한 첨단기기들이 넘쳐난다. 심지어 밤이 되면 밥 말리의 레게음악을 틀어두고 춤을 추기도 한다. 속모를 웃음과 썰렁한 영국농담이 그가 가진 유머감각의 전부이긴 하지만, 분명 그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거운 삶에 온전히 바치고 있다.

 그의 즐거운 삶에 중심이 되는 것은 도수가 낮은 달달한 술이다. 채식주의자인 찰스는 밤이 되면 콩으로 요리한 안주나 스페인식 토띠아와 함께 얼굴이 살짝 붉어질 정도로 샹그리아를 마셨다. 매일 밤 그는 그렇게 선선한 강바람이 부는 옥상에 앉아 한국에서 온 젊은이가 어설픈 영어로 말하는 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었다.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었다. 고등학교 때 230명 정원에 200등의 열등생이었던 이야기(서른 명은 씨름부였다), 지금 찰스의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준 예전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둘 다 아는 이였기에 호박씨 까는 재미가 쏠쏠했다), 멀쩡하게 다니던 학교 때려치우고 의대에 들어온 이야기(사실은 학사경고를 2번 맞고 제적당하기 전에 자퇴한 것이었다),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황당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 의사이기 이전에 작가로 살고 싶다는 꿈에 대한 이야기, 그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란 자신에게 느낀 좌절에 대한 이야기. 찰스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이따금씩 미국식 영어를 지적하며- 그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세비야에서의 마지막 날. 다음 행선지인 모로코의 탕헤르로 가기 위해 찰스의 도움을 받아 배편을 예매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옥상에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 했다. 짧게는 앞으로 남은 여정에 대한 이야기부터, 길게는 한국에 돌아가서 어떤 식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간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했던 찰스가 나에게 뜬금없이 질문을 했다.

 "만약 당신에게 마법과 같은 힘이 생긴다면, 내일 당장 무엇이 되고 싶나요?" / "날아다니는 것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 "아니지, 당신의 미래 말입니다. 마법과 같은 힘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내일 어떤 사람이 되어 살고 싶은지 묻는 거예요." / "당연히,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그럼 그렇게 될 겁니다." / "네?"

 "왜냐하면, 삶이 곧 마법이니까요."
 
 난간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 미끄러지듯 옥상 바닥으로 내려왔다. 찰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 않나요? 당신을 나에게 소개시켜준 그 친구를 사귀게 된 일도 분명 당신이 그녀를 얻기 위해서 노력을 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고, 열등생이었던 당신이 의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공부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잖아요. 그게 바로 당신의 삶이 마법이 된 경우입니다. 이미 몇 번의 마법을 부렸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더 많은 마법과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맞다.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흔히 잊고 살지만 20년에서 30년 정도를 살아오면서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마법을 부려왔다. 어머니,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나 두 발로 걷기 시작한 것도 마법이고, 중학교 때 점심을 5분 만에 먹고 남은 40분 동안 비좁은 운동장에서 수 백 명이 동시에 축구를 한 것도 마법이고, 고등학생 때나 재수생일 때, 혹은 대학생일 때 남들보다 조금 덜 놀면서 의대나 의전원에 들어온 것도 마법이며, 우수한 성적으로 해리슨과 사비스톤을 섭렵하고 올라가든, 야마만 눈에 바르고 가까스로 올라가든 진급한 것도 그 자체로 마법이다. 그러니깐 우리의 일상은 사실, 우리가 부려온 마법의 결과물이다. 

 매일 강의실에 갇혀 볕도 제대로 쬐지 못하고 앉아있다 보면 사는 것이 지난한 농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늘 찰스의 마지막 조언을 되뇐다. 꿈이 무엇이든, 이루고자하는 바가 무엇이든,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움직여본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분명 앞으로의 내 삶도 내가 의지하는 바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그 짤막한 문장을.

Life is Magic.
삶은 곧 마법이다.

이현석 기자 / 영남
<vandalit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