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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자

지난 11월 29일. 한국 최북단의 작은 섬에 백 칠십 여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해병대원 두 명과 민간인 두 명이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십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으며 인천의 찜질방은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북한이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 영토에 포격을 가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 한글로 쓰인 모든 댓글은 ‘보복 제대로 하라’, ‘언제까지 당하고 살 것이냐’, ‘까짓 거 전쟁 한 번 하자’와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주전론자들의 것이었다. 전운의 기운이 감돌았고 정부는 ‘다시 한 번 공격이 행해질 시 단호한 대응’이라는 수사를 멈추지 않았다.
북한 김 씨 일가의 만행이 빚은 비극에 대해서 슬픔과 노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더욱 평화의 숭고한 가치가 가지는 빛이 바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포탄의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평화를 논하는 것이 지나치게 순진해 보인다고 생각될 지도 모른다. 순진하다고 생각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영토가 유린당하고 장병들과 민간인이 죽어나간 상황에서는 화평을 주장한 이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역적으로 몰렸다. 대표적인 예가 병자호란이다. 국내외의 정세를 무시했던 주전론자들은 주화론자들을 역적으로 몰았고 그 결과 청나라와 전면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말에 ‘삼전도의 굴욕’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단호한 대응’만 이야기 한다. 그러나 먼지가 가라앉은 뒤를 생각해보라. 가시적인 무력 긴장이 소강국면에 접어든 후에도 여전히 '단호한 대응'이라는 수사만 반복할 수 있을까? ‘단호한 대응’의 근거인 함참본부 합동 전투지침, 즉 ‘교전수칙’에는 ‘적의 공격에 두 배의 물량으로 공격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다. 창과 칼이 부딪히면 쓰러지는 것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 뿐이다. 양측의 단호한 대응 끝에 전면전이 벌어졌던 1949년부터 삼 년 간 한반도에서 이백만 명의 인명이 사라졌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하수상한 시절은 국제연합(UN) 본부 맞은 편 벽면에 요조(凹彫)되어 있는 구약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내우외환의 시대에 태어난 종교인 기독교에는 수많은 성경이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가 이사야서다. 화자인 이사야가 생존했을 당시, 유대왕국에는 내전과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했으며, 앗시리아의 산헤립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공격 당하여 유대왕국이 존폐의 기로에 선 일도 있었다. 그런 전란의 와중에서도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이사 2,4)”
이 땅에 놓인 전란의 위기를 타개할 실용노선은 피를 부르는 칼과 창을 녹여, 보습 대일 땅에 낫으로 거둘 곡식을 기르는 일이다. 이것은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지금 선택할 수 있는 항목 중 가장 합리적인 까닭이다. 예컨대 포격 이후 국가불안을 경제상황에 반영하는 지표인 ‘신용부도 스와프 프리미엄’은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보다 한국이 더 상향되었다. 또한 안보가 한반도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뜻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역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경제가 안정되는 것과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 책무다. 이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말뿐인 ‘단호한 대응’보다는 실질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 대응이란 평화다. 평화는 비싸다. 그러나 제 아무리 값싼 전쟁도 가장 사치스러운 평화보다는 비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78호(2010.12.14) > 오피니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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