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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지진, 어떤 지평에 서서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인간의 내심은 주변 환경에서 비롯된 공포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흔히 인간을 오해와 편견의 동물이라고 한다. 오해와 편견은 인간의 본질인 모순을 이룬다. 이 모순은 주변 환경이 어느 순간 공포로 변했을 때 명확하게 드러나며, 그 공포는 인간의 현실을 위협하는 사회적, 기술적, 정치적 위험에서 비롯된다.
불과 한 달 전에 일어난 일본 대지진 이후 인접국인 우리나라에서 나타난 혼란상은 인간의 내심이 기술적, 정치적 위험에 의해 공포로 리모델링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지진 직후 한반도 남쪽에서는 유사 이래 최고액의 성금이 기탁되었으며 너나 할 것 없이 깊은 슬픔을 표했다. 그러나 일본사 교과서 개정판에서 독도영유권 주장 문제가 대두되자 일본대지진 피해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여기에 원전에서 쏟아져 나온 방사능 문제가 직결되자 일본 대지진이라는 휴머니즘을 재고하게 해준 사건은 열도에 대한 비난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이 인간의 내심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올곧은 방향으로 경주하도록 노력하는 것 역시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역사를 아울러 보편타당한 진리로 이야기되는 것은 바로 이런 혼란상에서도 중심을 지켜낼 수 있는 준거를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정확히 바라보는 핵심은 그 준거를 무엇으로 잡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떤 지평에서 일본대지진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현시점에서 보면 과거사 문제에 대한 반성 없음과 당면한 핵물리적 위협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민족 자체를 하나의 적성국 내지는 적성민족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가 내지는 민족이란 객체를 향한 동정과 비난이 한국이라는 국가 혹은 민족에 자기동일시하고 있는 주체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이것은 분명 사려 깊지 못한 사고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정작 의문부호를 기시해야 할 곳은 주체와 객체에 관한 것이며, 이는 결국 층위와 계급의 문제로 귀결된다.
예를 들어보자. 일본대지진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들의 인구 중 30% 이상은 60세 이상으로 초고령 지역사회다. 이들 지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수 기나 유치한 것도 지역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열도 내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에 기술지배의 총아인 원전을 유치하면서 그 기술이 안고 있는 리스크를 최하위 계층이 고스란히 감당하게 되었다. 이런 마을에 쓰나미가 밀려왔다. 리스크가 현실의 위협으로 변한 지금, 그곳에 살았던 이들은 세계 최강국이라는 지위와 전연 동떨어진 ‘난민’이 되었다. 
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내 세력이나 방사능 대책에 있어 국가 이기주의에 빠진 정책을 주장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우경화 일로의 일본 정치인들, 관료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우파 지식인들은 물론이며 이를 방조해온 자유주의 지식인일 것이다. 지역적으로 이들 중 미야기현과 같은 리스크가 큰 빈곤지역에 거주하는 비율은 아마 극히 적을 것이며 계급적으로도 분명 이들은 유산계급 내지는 지식인계급일 것이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원전 위험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원자력산업에 대한 위험 교육은 전무한 채 오직 선순환만 부각시켜 대국민홍보를 하면서도 과거사정리위원회를 해체시키고 위안부 피해대책 활동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조해주지 않는 이 나라의 소위 지도층이라 불리는 이들보다 쓰나미에 희생된 일본의 필부필녀들이 더욱 간악한 존재일까? ‘아니다’라는 대답을 했다면 우리의 눈이 어두워지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범주의 오류 때문이다. 민족과 국가라는 범주 앞에서 계급과 계층이라는 범주가 가려질 때 우리는 지정학적인 요인이 얽힌 사건을 옳지 못한 시선으로 판단하게 된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일본 시민단체의 경우

얼마 전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부조리에 항거하던 이들이 행한 따뜻한 기도는 우리가 어떤 지평에서 사고해야하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난 달 16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 962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집회는 집회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추모집회’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누구보다도 ‘일본’이라는 상징체계에 대해 분노할 그녀들은 열도에서 자신들과 마찬가지의 상황에 처했을지 모르는 그곳 민중들을 위해 간절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실제로 지진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미야기현에는 일본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중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의 주인공이었던 송신도 할머니다. 쓰나미가 몰려온 날 송신도 할머니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할머니의 대일본정부 재판을 지원하던 일본 시민단체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은 한국 측의 위안부 피해대책 단체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독립영화사 측에 할머니의 실종을 가장 먼저 알렸고 수 십 만의 난민들로 가득 찬 수용시설에서 할머니를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 결과 일주일 만에 난민 수용소에서 할머니를 찾았고 지금은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모신 상태다. 십 수년 간 할머니의 재판을 돕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할머니를 찾은 그들은 한국 정부도, 한국 위정자도, 한국 민족도 아니었다.

연대감과 비판이 향할 지점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하여

인간의 내심과 국가주의적 이념을 동일시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에도 내화되지 않은 민주주의에서 비롯된 일종의 아노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노미는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물활론적으로 인식하는 동아시아 국가에서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인다. 물론 과거사 왜곡 문제와 방사능 피해라는 문제는 분명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책임질 대상을 잘못 설정한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비판과 비난은 오해와 편견을 부추길 뿐이다. 가없는 죽음에 대한 연대감은 분명 유지되어야 하며 우리가 강력히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도 연대감과 비판이 향할 지점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묘가 요구된다.

이현석 기자/영남
<h@e-mednews.com>

'80호(2011.04.11) > 오피니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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