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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는 생선일까

80호(2011.04.11)/오피니언 2011. 5. 6. 22:14 Posted by mednews


고래는 생선일까

경남 울주군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에 새겨놓은 그림이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 그림에는 각종 사냥도구와 토끼, 사슴, 물개와 같은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어 먼 옛날 우리네 조상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의 중심에 고래들이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끼니 해결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고래사냥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바위에 고래를 새겨 두었습니다.

‘고래는 생선이다’라는 명제를 두고 어느 자연대 교수와 인문대 교수가 두 시간동안 입씨름을 했지만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전적인 분류를 따르자면 포유류에 속하는 고래는 어류에게만 허용된 물고기나 생선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기가 어째 좀 부자연스럽습니다. 멸종위기에 처해 포획이 금지된 동물인 고래를 식탁에서 늘 마주하는 고등어나 꽁치 같은 아이들과 동일선상에 놓기가 미안해서일 수도 있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고래는 엄밀히 말해 생선으로 치지는 않습니다.

일견 그리 복잡해보이지는 않는 이 질문을 두고 두 교수가 엎치락뒤치락한 것은 어째서일까요? 어깨에 작살을 멘 채 통나무배를 타고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내달리던 오천년 전 조상들은 고래가 생선일지 아닐지 그 구분을 헷갈려 했을까요?
문제의 핵심은 ‘이름붙이기’의 이면작용에 있습니다. 대상에 이름을 다는 약속행위는 ‘스펙트럼’에 대한 인식을 전제합니다. 빨강을 두고 빨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빨강 이외에 다른 색깔들도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처럼, 유개념에 종차를 적용함으로써 정의(definition)가 성립한다는 점에서 이름붙이기는 태생적으로 분류나 구분과 맞닿아 있습니다.

‘포유강 고래목의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는 약속에 준해 고래를 바라본다면 어류에게만 허용된 ‘생선’이라는 이름은 자동으로 배제되는 반면, 다소 자기중심적이긴 하지만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물에서 살고 먹을 수 있는 동물인 고래를 생선으로 간주하는 데 거리낄 게 없습니다. 고래에 ‘포유강’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고래가 가진 생선으로서의 속성이 무너져내리듯,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 대상을 파괴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그 인문대 교수는 식탐만 강한 사람이기보다는 고래를 고래 자체로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 언어가 세상을 재단해내는 힘은 가공할만합니다. 백혈병을 네 가지로 나누고 그 중 한 가지를 또 일곱 가지로 쪼개어 곧 죽을 사람도 살려내는 현대의학을 비롯해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이기 중 99%는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바디감’이라는 단어를 접한 후 커피 맛을 조금 더 잘 느끼게 된 바리스타처럼, 언어가 없었다면 애당초 대상을 인식조차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어는 본질적으로 파괴를 통해서만 기능할 수 있는 까닭에, 우리 무의식에 교묘한 함정을 파 넣기도 합니다.

‘전문직’이라는 단어는 세상의 직업을 전문직과 전문직이 아닌 것으로 나누지만 그 기준은 애매하며,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비전문성을 강요합니다. 외(外)할머니는 (친)할머니에 대해 바깥쪽에 위치하는 존재로 규정되며, ‘예과생’이라는 단어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한 예비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이라는 뜻의 ‘의예과 학생’의 줄임말일 뿐이지만 ‘본과생’에 대비되어 권력관계의 함의를 주입받습니다.

‘사랑’이라는 한 낱말을 던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감정과 기억의 그물을 혀 밑에 우겨넣어야 할까요. 진정한 정체성은 그를 겨냥한 모든 이름이 사라질 때에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래는 자기 이름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면 포유류라는 이유로 생선이 아니기보다는 차라리 당신에게 생선이고 싶어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편집장 최성욱
<editor@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