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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74호(2010.04.19.)/오피니언 2010. 4. 30. 10:18 Posted by mednews

 

감동으로 다가온 ‘환자체험’을 배우자

 지난 달 초, 국내 한 대학병원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의예과 신입생들이 병원으로 몰려가 직접 접수를 하더니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누워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관동의대에서 시행된 <가치관 재정립을 위한 집체 체험연수>의 일환이었다. 병동에 입원한 학생들은 환자들과 면담을 통해 그들의 고충과 바람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이 대학 신입생들은 보호자, 간병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나눔을 실천하는 명사들과 만남을 통해 인성을 재고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모든 체험활동을 마친 학생들은 감상과 포부를 적어 타임캡슐에 보관했다. 대학 측은 졸업 후 의사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학생들에게 다시 나누어줄 것을 약속했다.
 기존의 의과대학에서 행해지던 인성 강화 프로그램과 차별화 된 이 프로그램은 의학교육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비의료인들이 의학과 술기를 배우기 이전에 피행위자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역지사지의 묘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의학교육이 잊고 있었던 ‘공부’의 참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옛 현인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피력했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든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덕행과 수양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공부(工夫)’다.
 안타깝게도 다른 모든 근대화된 고등교육과정과 마찬가지로 의과대학 교육과정은 ‘공부(工夫)’보다는 ‘훈육(訓育)’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교육과정 상의 한계는 환자들이 의사들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사를 속되이 일컫는 ‘칼잡이’와 같은 말에는 영혼이 없는 일부 의사들에 대한 환자들의 불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의대생이 ‘칼잡이’가 아닌 참의사가 되는 도상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때문에 그 길을 올곧게 닦는 일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의과대학 당국은 진정으로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의사의 영혼을 회복할 수 있는 ‘공부’에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한 의과대학의 실험이 예비의료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 의료, 거꾸로 갈 셈인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23일, 하원을 통과한 건강보험개혁 범안에 정식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건강보험 개혁이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었다. 이번 개혁안은 10년간 9400억달러를 투입해 무보험자 3200만명에게 보험 혜택을 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빈곤층에게 제공하는 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의 수혜 대상을 늘리고 중산층에겐 보조금을 지급한다. 또한 민간 보험회사들을 규제하는 조처도 마련되어, 계약자를 상대로 한 보험업계의 횡포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은 OECD에 가입된 선진국 중 유일하게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국가이다. 때문에 직장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민간의료보험을 이용하여야 하지만 이마저도 비싼 보험료를 요구하기 때문에 결국은 의료의 사각지대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현재 미국 인구의 17%인 5400만명이 의료 보험 없이 생활하고 있다.
 의료보험 개혁안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은 지난 100년간 숙원사업이었던 전국민 보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 개혁의 의의는 크다. 민영화의 최전선에 있던 미국이 시장에서 운영되는 의료 시스템의 비인간성과 비효율을 인정하고 공공성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6일 보건복지부는 의료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시키고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번 개정안에는 원격 진료 및 의료 기관의 부대사업 허용, 의료기관 간의 합병을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의료기관이 병원경영지원사업 등의 부대사업으로 수익을 창출 할 수 있는 길을 터준 이번 개정안에 시민단체는 민영화의 서곡이라며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당사자인 의협은 원격 진료 도입에는 반대하지만 다른 쟁점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손익 계산 후에 1차 진료의에게 불리할지 모를 원격진료 안에는 반대하고, 의사에게 유리할 수 있는 의료 민영화 관련 사안에는 조심스레 찬성표를 던지는 모양세다.
 많은 의사들과 몇몇 의대생들은 의료 민영화가 되면 의사에게 유리한 진료환경이 펼쳐질 것이라며 반가워한다. 하지만 민영화는 의료의 운영주체를 자본에게 넘겨주겠다는 것이지 의사에게 주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민영화로 이익을 보는 이들은 대형병원과 민간 보험회사, 소수의 유능하다고 인정받은 의사들이다. 절대 다수의 의사들은 병원에 고용되어 경영진의 지침에 맞춰 진료하는 샐러리맨 ‘의사’가 될 것이다.
 게다가 의료 민영화의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온다. 진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몇몇의 환자들은 수준 높은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영화의 수순으로 당연지정제 마저 폐지된다면 건강보험에 의지해 살아가는 평범한 국민들에게 병원 문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의사단체와 공화당의 반대가 있었지만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세금을 조금 더 내더라도 공동체가 함께 건강해지는 길을 택했다. ‘국민의 건강권을 책임지는 의료인’이라는 명제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의료의 공공성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지켜가야 한다. 의료권마저 승자독식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의사가 꿈꾸는 진료환경은 결코 의료 민영화를 통해서 실현될 수 없다. 의료 민영화 환경에서 의사는 노동자일 뿐 주인이 아니다. 민영화의 최전선에 있던 미국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한국의료는 오히려 시간을 역행하는 결정을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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