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서평: 한의학에 작별을 고하다(장궁야오 저)

 

 

 

 

책 소개

 

제목 : 한의학에 작별을 고하다
저자 : 장궁야오
역자 : 박혜은
출판사 : 전남대학교출판부

 

왜 키가 크지 않나요

 

친가 식구들이 키가 크지 않은 까닭인지 부모님은 우리 형제가 어릴 때부터 잘 자라게 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셨다. 그 중 가장 돈이 많이 든 것은 성장클리닉을 받으러 한의원에 다닌 것이었다. 아홉을 주고도 하나를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했던가, 작은 한의원이 아닌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한의대의 대학병원 과장에게 클리닉을 받게 되었다. 최근에는 비만전문한의원, 성장전문한의원 등 다양한 ‘전문 한의원’이 존재하지만, 그 당시 대학병원 과장에게 받는 성장클리닉과 한약 값은, 모르긴 해도 둘을 합쳐 사회초년생 월급을 훨씬 넘는 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와 동생 모두 키는 크게 자라지 않았고, 심지어 동생은 몸살기운 같은 것을 계속 겪더니 붓고 부어 20kg 가량 체중이 불었다. 한의사는 사람에게는 크게 4가지 체질이 있는데, 체질에 따라 본인이 사용한 약물의 효과가 적거나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며, 대신 한약에 있던 좋은 성분으로 인해 우리가 그나마 건강하게 큰 것이라고 했다. ‘좋은 약을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 형제의 체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한의사가 사람에게 4가지 체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혈액형 검사처럼 미리, 그 ‘체질’이라는 광범위하고도 대략 생각해봐도 4가지는 넘을 것 같지만 4가지라고 이야기하는 그 특성을 알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만약 우리의 ‘체질’이 그 약 성분에 적합지 않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다른 약재를 사용하거나 아예 우리가 비싼 돈 들여 클리닉을 받지 않는 등의 다른 선택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며 어린 나이임에도 다소 억울하다고 느꼈던 경험이 있다.


이 책은 위와 같은 경험이 우리 형제의 ‘체질’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백보를 양보하여 우리 체질 문제였다고 해도, 그렇다면 그 ‘의사’는 본인이 처방한 약이 환자의 체질에 따라 큰 부작용 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사전에 설명이나 체질검사 같은 것은 하지 않고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해본 다음에야 ‘내 체질과 약이 맞지 않는다’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병원에 다닌 시간과 돈은 단지 ‘나는 그 약과 맞지 않는 구나’라는 것을 알기위한 검진비용이었던가.


이 책은 이러한 일들이 한의학 현장에서 실제로 자주 일어나는 것이며,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를,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한 사람다운 명료하고도 체계적인 말투로 풀어가고 있다. 장궁야오 교수의 문체에서는 단 한걸음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함과,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고뇌해온 학자로서의 확신이 담뿍 담겨있다. 다소 아쉬운 번역과, 오탈자나 같은 문장이 그대로 2번 씌어있는 ‘출판물로서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은, 누구나 경험해보거나 암암중에 생각하고 있는 한의학의 존폐, 혹은 문제점이라는 주제에 대한, 명확한 규칙과 잣대로 일말의 반박의 여지도 없게끔 논리적으로 완전한 장궁야오 씨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홍성욱의 과학에세이’의 저자인 홍성욱이나 장궁야오와 같이, 과학사를 전공한 사람들의 기본입장은 ‘과학실증주의’이다. ‘나름의 복잡한 체계’가 있다고 해서 함부로 ‘과학’이라는 이름표를 걸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동양철학과 한의학의 경계에 대하여

 

동양철학은 서양철학에 비해 그 역사도 길고 내용도 심오한 것이 많다. 비트겐슈타인이 ‘거의 모든 철학적 문제는 인간의 언어의 모호성으로부터 나온다’라며, ‘말할 수 없다면 침묵해야한다’라고 한 것과 같이 서양의 학문이란 명확하고, 받아들이는 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없도록 직선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그에 비해 예로부터 한자문화권의 지식인들은 예로부터 ‘선문답’으로만 이루어진 대화를 주고받거나, ‘그들만의 리그에서만 이해가능한’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한 강력한 비유들을 자주 사용하는 곡선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서양철학이 더 우수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것은 동서양철학의 성질이 다른 것이지 어느 것이 낫다라고 우열을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되려 동양철학가 보여주는 사유의 깊이가 훨씬 깊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학문적 성향의 차이는 크게 2가지의 결과를 나았다.


첫째는 서로 다른 파생학문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은 객관성과 명확성을 중시하여 객체와 주체를 분리하여 다루다보니, 자연히 객관성이 핵심인 과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반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질 수 있고, 인생 전반에 대한 ‘통합적 고찰’을 다루는 동양철학으로부터, 유수의 ‘문화’들, 문학이나 정신수양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둘째로는, 서양의 학문은 명확하여, 하나하나의 명제들을 무기로 자연이라는 존재에 대해 한 층, 한 층 이해를 더해가는 등,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다’라는 도전정신을 길러주었다. 반면, 동양의 학문은 통합적이고 심오하여, 복잡한 시스템을 하나씩 해부해서 보려는 도전정신보다는 대중들로 하여금 ‘학문의 세계는 심오하여 선택된 몇 명의 성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구나’는 식이나,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문화’에 있어서 그러한 관점의 차이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전혀 어느 쪽이 우세하거나 열등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과학이니만큼,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문학과 같은 ‘개인적 해석’이 용인되는 여타의 문화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하는 바와 같이 고대의학의 한 부류인 한의학은 그 학문의 성격이 철학이나 문화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초기 단계의 학문’이지 현대적 관점에서 독자적 학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의학임을 재창하면서도 문학이나 음악과 같은 여타 문화와 같은 모호함과 애매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의학의 모체라 할 수 있는 동양철학의 ‘심오함’과는 명확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심오함이란 탐구의 가치가 충만한 것이지만, 의학에서의 모호함과 애매함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할 요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나라이고 중국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다보니, ‘동양학문들은 다 심오해서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라는 기대감을 품게 만든다. 심지어는 의사들도 몸이 허하거나 잠을 잘못자면 한의원을 찾는 사람이 많은 만큼, 일반 대중들에게 한의학의 애매함과 모호함은 ‘과학적 잣대로 비판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닌, ‘본인의 지적능력부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자연의 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 어떤 심오한 원리도 담겨있지 않을뿐더러, 설령 한의학의 원리가 실제로 ‘인간의 지적능력의 부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자연의 힘’을 포함하고 있다하더라도 의학에 있어서는 컨트롤 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힘이라면 배제하는 것이 맞다. 치료의 결과에 누구도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바람과는 달리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사람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목숨을 다루는 학문은 어떤 기준을 갖춰야 하는 가’를 잘 지적해낸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라고 하겠다. 의과대학생인 나조차도 ‘설명은 못하지만 4000년을 이어온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왔는데, 단지 한의학의 내용상의 문제 뿐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한의학이 계속 존속해왔는지,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가 뒤얽혀있는지를 알려준 것도, 번역이나 편집 등의 출판물로서의 완성도가 낮더라도 내용에서 얻을 건 얻자는 곰 같은 독자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일 것이다.

 

이장원 기자/중앙
<wonwon95@naver.com>

 

'107호 > 오피니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집자가 독자에게  (0) 2015.11.14
[사설] 전공의가 ‘장마당’을 세울 때까지  (0) 2015.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