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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판례를 넘어서 가라 - 보라매병원 사건 f/u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점심메뉴를 정하는 것처럼 실패하더라도 다음 기회에 만회할 수 있는 선택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쉽게 돌이킬 수 없는 선택도 있다. 의학의 길에 접어든 학생들은 지금은 지나간 언젠가에 그런 비가역적인 선택을 했던 이들이다. 그 때의 고통을 다시 받느니 차라리 남이 골라줬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선택의 갈래에 서게 된다.

지구 위에 나쁜 의사는 있어도, 나쁘려고 노력한 의사는 없다. 치명적인 실수를 하거나, 혹은 의도된 악행을 행한 의사라도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의사라는 일의 숭고함을 새겨듣고 의대의 문을 두들기던 그 순간에는 말이다. 그러나 예후나 QOL이라는 말을 환자의 미래보다 스스로의 미래에 더 이입해서 사용하게 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의사, 예비 의사들에게 그 때의 순수함을 지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껍데기는 가라던 시를 읽어 내리던 시절이 무색하도록 바이탈보다는 안구껍데기, 얼굴껍데기에 더 깊은 관심이 가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면 의식적으로 바보의사 장기려를 생각해본다. 이젠 의료계에 영웅의 시대는 지나갔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속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는 그런 성인聖人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치료비가 없는 환자에게 뒷문으로 도망치라 귀띔했다던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1997년 12월 4일, 2주 전 보도된 IMF 외환위기로 인해 조바심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득한 가운데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동 425번지 보라매병원 응급실에 머리를 다친 한 환갑의 남성이 밀려왔다. 신경외과 전문의는 수술을 집도했고, 환자는 회복기에 접어들었으나 보호자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퇴원을 요구했다. 그 의사는 정 그렇다면 1주일 정도만 더 치료를 받은 뒤 몰래 도망치라고 말했다. 장기려가 죽은 지 2년이 지났지만, 장기려는 그 의사의 의술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보호자는 지속적으로 퇴원을 요구했고, 결국 의사는 각서를 받고 퇴원을 승인한다. 인턴은 앰뷸런스로 환자를 자택에 데려가 산소호흡기를 제거했다. 인턴이 자리를 뜬 후 환자는 곧 사망했다. 보호자와 의사는 살인죄로 기소되었고, 지난했던 7년간의 재판 끝에 대법원은 의사와 보호자에게 살인방조죄와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의사들에게 IMF보다 더 큰 공포를 안겨줬던 보라매 병원 사건의 전말이다.

당시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는 아직 같은 병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최근 죽음과 관련한 특집을 준비한 C모 일간지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호흡기를 제거했던 인턴은 서울 원자력병원 흉부외과 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받았던 그는 그 사건이 당사자들에게 많은 상처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1심에서 유죄판결을 선고했던 서울지법 남부지원장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연명치료를 포기했다. 그는 '퇴원방조의 관행이 그대로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유죄를 선고했다고 말했다.

그의 판결은 의사는 의술에 대해 더 깊은 성찰을 하라는 경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바이탈을 잡고 수술을 하는 의사들을 방어적으로 만들었고, 분과를 선택할 의대생들의 행보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의대생들의 선택이 지금의 분과별 전문의 비율을 만들었다.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존엄사에 관한 논의도 얼어붙었다. 의사들, 의대생들 각자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던 수많은 장기려가 그 판결을 기점으로 사라졌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순수함을 지키고자 했던 의대생들도 처음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스스로의 예후와 삶의 질을 따지고 가족과의 생활을 추구하는 것 또한 스스로의 숭고한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오롯이 의대생 각자의 판단이어야 한다. 보라매병원 사건은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우리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려 은근하게 뇌까리는 종양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17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은 의대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 판례를 넘어서 가라'고. 

 이준형 기자/가천 <bestofzone@e-me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