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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워크캠프 후기] 힐링캠프, 캄보디아 

 

 

의과대학이라는 틀에 박힌 생활을 해야 하는 내가 익숙한 것에 금방 지루해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본과에 올라온 지 고작 일 년밖에 되지 않았건만 시험이 주는 중압감 못지않게 높아져 버린 내 역치 때문에 지난 학기는 맘을 다잡기가 힘들었던 한 학기였다. 아직은 실질적이게 느껴지지 않았던 의학에 ‘지금 하는 이 공부가 무엇을 위한 것 일까?’하는 물음은 나를 자꾸만 다른 곳으로 벗어날 탈출구(혹은 변명)를 만들기도 했고, 대내외적으로 소란스러웠던 학교의 분위기 또한 때론 내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렇게 오춘기 같은 학기를 보내는 내내 나는 방학만을, ‘내 주위에서 벗어난 새로운 자극’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나는 예과 때 유예했던 워크캠프를 떠올렸다. 지금 아니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약간의 조바심 속에서 나는 시험기간도 뒤로 한 채 캄보디아로 워크캠프를 신청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며 늘 여행이라면 철저한 사전 계획을 세우던 나였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그냥 한번 부딪혀 보지 뭐’, 무언가를 보겠다 혹은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욕심은 모두  버렸다. 어떤 편견도 계획도 없이 여행에서 마주치는 작은 우연과 인연들로 하루하루를 엮어가고자 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도착한 캄보디아는 내게 '자유, 해방감' 그 자체였다.
거의 모든 시간 눈만 떠있으면 찾던 핸드폰, 카카오톡, 페이스북이 사라진 것은 그 시작과도 같았다. 긍정적이라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자 '자유'를 느낀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렇게 진정 나 홀로 남겨졌을 때야 나는 내가 믿었던 소위 소통의 장이라는 것들이 오히려 나를 속박하고 있었음에 순간 아차하였다. ‘참 조용하다’ 그렇게 내 목소리, 내 생각이 들리기 시작했고 내 자신에 집중하게 됐다. 그리고 매체의 소음에서 멀어지고 나자 비로소 내 주위의 풍경과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워크캠프를 하는 곳은 캄폿(Kampot)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어촌 마을이었다. 캠프는 바다와 갯벌 위에 지어진 수상가옥이었고, 갯벌 너머 마을 입구까지는 논이 펼쳐져 있었다. 일과가 많지 않을 때면 바닷바람을 느끼며 누워있을 수 있었는데, 그때의 바람과 그 순간의 편안함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삼다도가 고향인 나이지만 과연 내가 가만히 자연 속에 묻혀 바람이 가져오는 고요를, 온몸으로 바람을 그저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나는 사진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캠프지의 풍경과 그 풍경이 주는 느낌을 그림으로 남기곤 했다. 하고픈 것이 많아 늘 바쁘게 살아온 내가 조용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 여유가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자연의 시간에 따라 흐르듯 지내는 동안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 아득바득 살았던가 하는 반성이 절로 들었다. 때로는 느린 삶이 더 진정성 있고 풍부할 수 있음을 나는 이곳에서야 느낄 수 있었다.
캠프의 오전은 Mangrove를 심는 일로 시작되었다. 서서히 이곳까지 진행되는 개발로부터 이 마을을 보존하고자 우리는 Mangrove를 바다에 심고, 다리를 만들었다. 캠프의 참가자들은 일본, 한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고 캄보디아까지 정말 다양했다. 그러나 이런 문화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일을 할 때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물에 빠지며 나무를 심고 물속에 다리를 위한 기둥을 박기 위해 돌아가며 뛰었다. 아무런 경제적인 대가 없는 일이었지만 일을 한다는 것 자체로 즐거울 수 있다는 데에서 나는 큰 행복을 느꼈다. 워크캠프를 오기 직전 나는 서브인턴, 메디슨청년의사봉사체험캠프를 참여하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현실적인 문제들과 함께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을 깨달았다. ‘재고 따지기 보다는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것을 하자.’
오전의 일을 마치고 나면 우리들은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마을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바다 바람과 함께 나른한 점심을 맞이할 때면 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조별로 미리 모여 수업자료를 준비했다. 가르칠 내용을 상의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익힐 수 있는 노래나 게임을 고민했다. 너무나 간만에 해보는 ‘창의적인’ 일에 어색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아이들과 만나고 소통하며 능숙해져 갔다. 처음에는 25명 가까이 되는 반 아이들의 크메르어 이름을 외우는 것 또한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늘 지식을 갈구하는 듯한 아이들의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을 볼 때면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주고만 싶었고 생각보다 빠르게 이름도 익힐 수 있었다. 때론 가기 전까지 힘들었던 몸도 그런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칠 때면 절로 힘이 났다. 때로는 말도 잘 안 듣고,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집중을 시키기가 어렵기도 했지만 그만큼 정도 참 많이 들었던 아이들이었다.
마지막 수업, 우리는 ‘Wonderful' 이라는 글귀와 함께 아이들의 이름과 그림, 그리고 각 나라의 말로 학생들에게 쓴 한 마디로 구성된 카드를 나누어주었다. 나는 내가 쓴 한국말을 캄보디아 캠퍼에게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내가 쓴 말을 영어로 전달하는 동안 날 바라보던 그 장난꾸러기들의 눈망울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비록 그 아이들에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아이들의 눈과 표정에서 “선생님이 나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너무 알고 싶어요.”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열심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건강하세요. 꼭 또 만나고 싶어요.” 아이들은 나에게 크메르어로 수줍게 한 글자씩 적어나갔다. 그리고 가장 장난꾸러기였던 Zamri가 “I love yo‘o’”라는 쓰는 법도 가르쳐준 없는 그 말을 써주었을 때는 정말 가슴이 먹먹했다. 마지막까지 몇 분 동안이나 ‘Bye bye’를 외치며 우리는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렇게 마지막 날 밤은 캠퍼들과의 깊어진 정도 아이들과 깊어진 정도 떼어내기가 참 힘들었던 기나긴 밤이었다.
360° 펼쳐져 있던 지평선과 논밭, 그 사이에 불쑥 불쑥 서있던 열대 나무, 그리고 돔처럼 둥글고 넓게 펼쳐져 있던 하늘 속에서 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함께 그렇게 천국 같은 2주를 보냈다. 아무런 바람도 없이 빈 마음으로 찾아갔던 캠프, 그러나 지금 나의 마음 속에는 그 곳에서의 소중한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탁 트인 자연에서 느꼈던 자유로움과 치유,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얻었던 활기와 밝음을 나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워크캠프가 아닌 힐링캠프였던 캄보디아를 나는 지금도 추억한다.
 
고유라 기자/서남
<youzr-_-a@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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