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료 역사 속의 인물 취재 4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 박에스더
박에스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입술이 갈라진 아이 하나가 부모와 함께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 구순구개열, 그 병을 앓는 사람은 흔히 언청이라고 불리는 병에 걸린 아이였다. 아이를 진료한 의사는 서양인이었고, 10대 한국 소녀가 통역을 맡았다. 당시 한국의 의술로 볼 때, 구순구개열은 불치병이었다. 그런데 통역을 맡은 10대 소녀의 입에서 ‘수술하면 정상이 된다.’라는 말이 나왔다. 아이와 부모, 그리고 통역을 한 소녀마저 놀랐다. 외과수술이란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술 후 얼마 뒤 아이는 완전히 회복이 되었고, 아이의 부모는 의사와 소녀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이 때, 소녀는 “그래! 나도 훌륭한 의사가 되어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했고, 얼마 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었다. 그 소녀가 바로 박에스더였다.
미국으로 떠난
이화학당 학생 김점동
박에스더는 1876년 서울 정동의 딸만 넷인 가난한 선비집안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점동으로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얻게 되었고, 1893년 결혼을 하게 되자 남편 박유산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가 되었다. 에스더가 열 살 무렵 정동에는 미국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다. 10살이 된 박에스더는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녀가 졸업할 무렵에는 통역이 가능할 정도로 영어를 잘하게 되어,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의사들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박에스더는 보구여관에서 주로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의 일을 돕게 되었다. 늘 헌신적이며 영리했던 박에스더가 마음에 들었던 로제타 홀은 박에스더 부부를 조수로 삼아 평양 선교활동을 떠났다. 그러나 평양 선교활동 중 남편이 발진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상심한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간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박에스더를 잊지 못해 박에스더 부부를 미국으로 초대하게 된다.
‘박에스더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우리라’
미국의 도착한 박에스더가 의사로 성장하기 까지는 두 사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 명은 박에스더를 미국으로 초대한 로제타 홀이고, 다른 한 명은 박에스더의 남편 박유산이다. 로제타 홀은 일찍이 박에스더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를 미국으로 불러 고교과정, 대학과정을 마칠 때 까지 전폭적인 지원을 해왔다.
남편인 박유산 또한, 자신보다 자신의 아내가 더욱 남다르고 공부를 향한 뜻도 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유학 생활 내내 힘겹게 노동하며 박에스더를 뒷바라지 해주었다. 이로 인해, 박에스더는 1896년 10월, 20살의 나이로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였고, 4년 뒤 1900년 6월에 의학박사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과대학 졸업시험을 치기 3주 전인 1900년 4월에 그녀의 남편 박유산이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슬픔에 빠진 박에스더는 졸업 후 바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매월 400명, 매년 5000명의
환자를 돌본 박에스더
당시 한국 여성들의 지위는 낮았다. 병에 걸려도 치료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고, 간단히 나을 수 있는 종기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를 못쓰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에 더해서, 남성 의사들에게 몸을 보여줄 수 없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존재했으므로 여성들의 치료 환경은 열악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박에스더는 이러한 여성 환자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책임감과 여성들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박에스더는 10여년간 매년 5000명의 환자를 돌보게 된다. 박에스더는 진료 활동 이외에도 근대적 위생 관념을 보급하는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박에스더의 죽음과 결핵요양소
1910년 4월 13일, 34세의 젊은 나이에 박에스더는 세상을 떠났다. 심각한 과로에 의한 폐결핵이 그 원인이었다. 늘 함께 했던 박에스더와 이별하게 된 로제타 홀의 아들 셔우드 홀은 폐결핵 전문 의사가 되어 그녀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로부터 18년 뒤, 셔우드 홀은 해주에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소를 세웠으며, 1932년에는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 씰을 한국 최초로 도입하였다. 박에스더의 한국 의료에 대한 헌신은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진 셈이다.
2006년 11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부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최연소로 입학하여 졸업한 박에스더의 공을 기려 그녀를 과학기술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2008년부터 ‘자랑스런 이화의인(醫人) 박에스더상(賞)’을 제정하여 동문 여의사에게 시상하고 있다.
박에스더는 어려서부터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으며, 그녀의 평생을 생명을 구하는 일로 보냈다. 혼란과 사건 가운데서 의료 윤리가 흔들리는 요즈음, 최초이자 최고로 기억되는 여의사인 박에스더의 삶을 통하여 의사로서의 삶에 대해 돌이켜 보는 것은 어떨까.
조성윤 기자/울산
<chosy08@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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