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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꿈과 이상, 우정과 사랑...
무라카미 하루끼 대표작 ‘상실의 시대’, 24년만의 영화화

준비되지 않은 스무 살,
그 혼란 속의 사랑

“열여덟 살 다음이 열아홉 살이고, 열아홉 살 다음이 다시 열여덟 살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누구도 스무 살이 되지 않아도 될 텐데.”
나오코의 스무 번째 생일,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와타나베에게 말한다. 아직 준비도 되지 않았지만, 누구도 스무 살로 떠밀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직 죽음을 선택한 사람만이 열일곱 살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녀와 어린 시절 내도록 함께 보낸 남자친구, 영원히 그녀 옆에 남아 같이 스무 살을 맞이할 줄 알았던 남자, 기즈키처럼.
기즈키의 단짝이었던 와타나베조차도, 그리고 그런 와타나베의 마음조차도, 나오코가 가진 스무 살의 부담을 덜어주진 못했다. 와타나베와 함께한 스무 살의 밤, 몇 달 후 와타나베는 요양원에 있다는 나오코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극도로 혼란스러워하는 나오코를 몇 번이나 찾아간 와타나베. 나오코는 두 가지를 부탁한다. 이렇게 찾아와준 것이 너무 고맙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그리고 영원히, 언제까지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이십여년 후, 와타나베는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작품의 원제목이기도 함)’을 들으며 슬퍼한다. ‘왜냐하면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쓴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긴 하지만.”

‘하루끼 신드롬’의 시작,
전 세계 1100만부의 베스트셀러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될 만한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그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야.”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 나가사와의 말이다. 냉소적이며 시크한 매력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압도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에만 흥미를 느끼며 살아가는 모습. 그런 그만을 바라보는 여자친구 하쓰미를, 와타나베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하루끼’식 섬세한 인물 터치가 잘 드러난 이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각자 자신만의 개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와타나베와 나오코, 나가사와와 하쓰미,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매력으로 와타나베에게 다가온 여자 미도리와, 요양원에서 나오코와 함께 지내는 레이코 여사 등. 작가만의 특이한 문체로 다듬어진 대화와 행동을 통해, 모든 인물이 마치 살아있는 듯 다가온다.
게다가 각 인물에 대해 팬층이 생기고 분석이 나올 만큼,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멋지면서도 스마트하다.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처음 만나는 장면, 혼자 강의를 듣고 혼자 밥을 먹는 게 좋으냐는 그녀의 질문에 와타나베는 이렇게 답한다.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을 뿐이지. 그런 짓을 해봐야 실망할 뿐이거든.”
문체뿐만이 아니다. 젊은 날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을 알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을, 감미롭고 황홀하며 애절한 사랑 이야기 속에 녹여낸 작품, ‘상실의 시대’. 하루끼에겐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발돋움하게 된 책이었으며, 지난 20여 년간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파고 들어간 책이었다.

24년간 허락되지 않았던 영화화

4년간 저자를 설득한 끝에 영화화를 허락받은 ‘트란 안 홍’ 감독. 직접 저자와 대본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류한 끝에, 24년 만에 상실의 시대가 스크린으로 나왔다. 한국에서는 지난 4월 21일 개봉하였다.
물론 영화화된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 영화가 원작만큼의 호평을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상실의 시대’ 또한 그랬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을, 그 섬세한 인물 터치를, 133분의 영화에 담기란 애초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이 작품의 수많은 열혈 팬들의 기대를 어찌할 것인가.
실제로 영화를 보면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이야기에만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도 중요한 부분만, 회상하는 장면이나 주고받은 편지 이야기 등은 대부분 빠진 채로 말이다. 와타나베와 많이 비교되는 나가사와는 ‘조금 특이한, 제 잘난 맛에 사는 남자’ 정도로 비추어지며, 여자친구 하쓰미는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미도리와 레이코 여사의 경우 “영화화되며 가장 부당하게 다루어진 캐릭터”라 할 정도로 원작과 차이가 있다. 특히 레이코 여사는 과거사 부분이 모조리 삭제되어, 원작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엔딩 부근의 씬에 공감을 하기가 힘들다.
“원작의 정서를 상실했기에, 원작의 팬들에게 어필할 수 없는 영화.”, “하루끼 작품 보다는 감독의 전작을 더 닮은 영화.” 많은 평론가들의 비판과 네티즌의 낮은 평점이 이어졌다.

‘하루끼 신드롬’의 메아리는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러간다. 처음 그 작품을 접했을 때의 설렘과 감동, 그리고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펼쳐졌던 상상의 나래, 그러한 것들 때문이 아닐까.
원작에서 느껴지던 그 깊은 여운, 알 수 없는 상실의 상처가 영화에도 녹아있다. 눈 덮인 산, 파도치는 바다 등으로 연출한 분위기, 감독의 섬세한 카메라 터치와 배경 음악 선택 등. 원작에서 읽은 내용과 잘 섞어가며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하루끼의 선택이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집에 돌아가서는 원작을 다시 펴보게 될 것이다.
24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혼란스러운 분위기, 준비되지 않은 채 스무 살을 맞이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 그런 그들에게, 6명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멋지고 스마트한 삶 이야기는 아직도 유효하다.

정세용 기자/연세
<avantgarde91@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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