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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귀는 당나귀 귀”
발설을 통한 글쓰기 치유법

<치유하는 글쓰기> vs <치유의 글쓰기>

‘햇빛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있는 한, 내가 그 햇빛과 하늘을 볼 수 있는 한, 나는 결코 슬퍼질 수 없다.’ - <안네의 일기> 中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암스테르담 은신기인 안네의 일기(The Diary of a Young Girl Anne Frank). 어느 날 갑자기 비좁은 공간에서 시간별로 이동해야하는 생활을 하게 된 안네는 일기장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고백’함으로써 힘든 상황을 극복해 낸다.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천 권의 글쓰기 책들, 그 중 안네의 일기를 떠올리게 하는 글쓰기 책이 있다. 글쓰기를 통해 안네가 그랬듯 스스로를 치유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책, <치유하는 글쓰기>와 <치유의 글쓰기>가 바로 그것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쓸 때, 우리는 치유를 위한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치유를 위한 글쓰기를 경험한 두 저자의 같은 듯 다른 두 책을 지금부터 만나보자.

누가 왜 써야 할까

‘누구에게나 반드시 얼마간의 비는 내리고 어둡고 쓸쓸한 날은 있는 법이니.......’ - 헨리 위즈워드 롱펠로
헨리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빛과 그림자 모두를 가지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삶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은 항상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치유하는 글쓰기>의 저자 박미라는 ‘발설’의 욕망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치유하는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려야 했듯이 인간의 고통도 발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치유의 글쓰기>의 저자 셰퍼드 코미나스는 특별히 치유의 글쓰기가 필요한 대상을 특별히 국한시키고 있지 않다. 통증클리닉의 전문의의 제안으로 일기 쓰기를 시작했던 그녀는 오히려 인간이라면 누구나 치유의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양면성을 느끼고 산다는 점에서 치유를 위한 글쓰기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이 두 저자는 공통된 생각이다. 글쓰기라는 단순한 활동이 자칫 그림자로 치우칠 수 있는 삶의 균형을 유지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써야 할까

‘미움이란 굶주린 사랑’ - 칼릴 지브란
치유의 글쓰기의 첫 단계는 무엇을 쓸지 결정하는 것이다. 저자 박미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을 인용하며 분노의 근원을 찾는 시간을 갖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죽도록 미운 당신’에게 편지 쓰기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셀프 인터뷰’를 제안한다. 물론 저자 셰퍼드 코미나스도 유언 편지와 같은 형식의 편지를 제안하지만, 그녀 스스로 치유를 경험한 일기의 치유 효과를 강조한다.

어떻게 써야 할까

‘예술의 언어는 심장의 언어이며, 그것은 정서적 구조의 언어이다.’ - 미카렛 미드
일단 형식이 정해지면 쓰는 것은 자유롭다. 치유라는 목적을 위해 우리는 가식을 버리고 솔직하게 써 내려가면 된다. 띄어쓰기나 맞춤법 같은 문법적 요소를 비롯하여 어떤 제약도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다만 쓰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숨겨진 깊은 내면까지 밖으로 끌어내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두 저자는 이러한 과정을 자기수용과 자기 용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치유의 글쓰기가 자발적으로 치유의 필요성을 느낀 필자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에서, 전체 과정에서 스스로를 존중하고 칭찬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 두 필자의 공통된 생각이다.

치유를 위한 글쓰기에도
독자가 필요한가

‘작가가 자기 소설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소설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독자가 그 책을 읽음으로써 완성된다.’ - 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中
독자의 필요성 측면에서 두 저자는 큰 차이를 보인다. 먼저 저자 박미라는 소설가 이승우의 글을 인용하며, 필자에게 사심 없는 지지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발설의 대상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저자 셰퍼드 코미나스는 치유를 위한 스스로의 솔직함과 상상력이 필요할 뿐 특별히 발설의 대상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특별한 독자 없이도 충분히 글쓰기의 치유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두 필자는 치유를 위한 글쓰기와 더불어 ‘명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이와 펜, 글을 쓰는 장소 같은 글쓰기의 외적 조건만큼이나 글쓴이의 내적 조건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의대생인 우리에게 이 책들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두 책 모두 치유를 위한 글쓰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두 책은 상이한 점 또한 많다. <치유하는 글쓰기>는 가족학과 여성학을 전공한 한국인 저자에 의해 집필된 만큼, 한국 문화와 접목시킬 수 있는 다양한 예시 글들이 잘 제시되어 있다. 반면 <치유의 글쓰기>는 암 병동에서 글쓰기의 치유 효과에 대해 강연해온 필자가 쓴 만큼, 임상적으로 참고할 만한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차이 때문에 나는 심리적 치유가 필요한 독자에게는 <치유하는 글쓰기>를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또 심리 치료에 관해 호기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치유의 글쓰기>를 먼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하지만 두 책 모두 치유를 위한 글쓰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큼 두 권 모두 읽을 때, 치유를 위한 글쓰기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 두 책은 다른 책과 달리 ‘읽는다’는 행위를 넘어 ‘무엇이든 써보는 노력’이 전제될 때 치유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당장 아무 종이 한 장을 펼쳐보자, 펜을 들고 낙서부터 시작해 보자, ‘교수님 귀는 당나귀 귀, 진짜 당나귀 귀, 누가 뭐래도 당나귀 귀.’, 누군가에게 말해보고 싶었지만 차마 못해본 이야기들, 마음은 답답한데 아무런 치유책이 없을 때 남긴 무의미한 낙서, 사소한 글쓰기가 당신의 뒤엉킨 마음의 실타래를 풀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결국 두 저자가 말한 ‘치유를 위한 글쓰기’는 스스로의 주치의로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오더가 아니었을까. 

노원철 기자/전남
<happywonchul@e-mednew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