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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75호(2010.06.07.)/오피니언 2010. 6. 9. 01:16 Posted by mednews

박지연, 이십대 다윗의 죽음 앞에서

 여기 한 죽음이 있다. 골리앗은 제 탓이 아니라 말하지만 누구도 골리앗 때문이 아니라고 믿지 않는 죽음, 삼성반도체 노동자 박지연의 죽음이다. 그녀는 자신이 죽어가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채 거대기업의 전횡 하에 신음하다 세상을 떠났다. 뒤늦게 이를 안 사람들이 분연히 일어나 불의에 맞서며 그녀의 죽음에 분노하며 재벌의 횡포를 비난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누구도 그녀가 스물세 살, 우리와 같은 이십대라는 것에 대해서는 쉽사리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값 등록금 공약 이행하라’, ‘학점보다는 인성을 보라’, ‘대학은 취업기관이 아니다’ 등 이십대를 둘러싼 수많은 담론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중 대학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른바 '’이십대 담론’이라는 것은 학비, 학벌, 취업으로 구성되는 ‘대학생 담론’으로 환원된다. 이런 현상이 가진 치명적인 문제는 성인이 된 이십대가 스스로를 미성년이라고 규정하게끔 만든다는 점이다. 즉, 사교육의 수혜를 받으며 학벌투쟁으로 유년을 보낸 대학생들이 또 다른 시혜를 바라는 담론을 내놓으며 스스로를 미성년에 유폐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나는 오늘 대학을 거부한다>는 선언과 함께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우석훈은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가 대학을 그만두면서 성인(成人)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담론 역시 대학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여전히 ‘대학생 담론으로 환원된 이십대 담론’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녀의 선언이 명문대라는 학력자본으로 인해 유효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

 대학입시 배치기준표에서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들의 경우는 어떤가? 소수를 제외하면 우리들은 계급투쟁의 장에서 무난히 세습에 성공했다. 복종에 익숙한 모범생의 습속을 유지하는 가운데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고민의 대부분은 재시와 유급에 있다. 대입이라는 학력자본 사수대회에서 가장 안정적인 자리를 점한 우리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안이함에 시야를 좁혀간다. 의사가 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것을 담보하지 않음에도 스스로 유예시킨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우를 찾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와 같은 이십대였던 박지연이 처했던 상황과 대비해본다면 우리가 미성년에 유폐되어 있다는 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어쩌면 그녀는 우리와 함께 놀던 친구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십대가 되면서 자신을 둘러싼 강퍅한 현실 때문에 일찍부터 노동시장에 몸을 맡겨야 했을 것이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우리보다 먼저 어른의 세계에 발을 디딘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불의 앞에 맞섰다. 그러나 골리앗 앞에서 쓰러진 수많은 다윗들처럼 그녀도 쓰러져야만 했다.

 그녀의 죽음은 유예된 미성년에 안주하는 우리가 삶을 유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성인이 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좁은 의료계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획득한 시선을 통해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에서도 정의를 인지해내는 지평을 가진다면 준비는 다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정의의 지평에서 그들의 편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들의 편에 서야 하는 까닭은 간단하다. 그녀는, 골리앗 앞에 당당히 맞섰던 스물 세 살의 다윗은 다름 아닌 우리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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