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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의술어


수학에서 점, 직선, 평면의 개념을 논하지 않고서는 기하학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점, 직선, 평면은 3차원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본질적이고 간단한 개념일수록 정의가 중요하다고 하지요. 새로운 공부를 할 때에 정의를 알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요소라 일컬은 점, 직선, 평면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쉽사리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혹시 우리가 이들의 정의를 배운 적이 있는지, 그 여부부터 판단하여 봅시다.

사실 점, 직선, 평면의 정의의 각각에 대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을 인간의 언어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점, 직선, 평면과 같이 그 자체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무정의술어(undefined term)라 부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잘 짜인 정의보다는 성질 혹은 서로 간의 상호관계를 이용하여 개념이 설명되는 것을 무정의술어라고 합니다. 점, 직선, 평면은 애초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에 관한 정의를 배운 적이 당연히 없습니다.(물론 신적 언어 혹은 조물주의 입을 빌려서라면 이들에 관해 정의 내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하학과 처음 만나면서 이들에 관한 정의보다는 성질을 배웠을 것입니다. 예컨대, ‘두 점을 지나는 직선은 유일하게 존재한다’라든지 ‘한 직선 위에 있지 않은 세 점을 지나는 평면은 유일하게 존재한다’ 따위의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고 지시해주는 설명들을 배웠습니다. 물론, 머릿속에 아직 기억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점, 직선, 평면은 각각이 스스로의 정의를 내어놓진 못하지만 상호관계를 이루며 서로에게 완벽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형, 동생과 같이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고 아껴주는 듯한 모습입니다. 인간 언어의 한계 때문에 각자에게 정의를 쥐어주지는 못했지만 모자란 점을 서로서로 보완해가며 서로를 끈끈하게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는 욕심 많은 수학자들이 점, 직선, 평면에게 그 자체의 정의를 심어주고도 싶어 했습니다. 수학자 라이프니치는 점을 보며 “위치가 있고 부분이 없는 것이다”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수학자 유클리드는 선에 대하여 “폭이 없는 길이이다”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정의란 무릇 일대일 대응이 되어야 하건만 과연 우리가 “위치가 있고 부분이 없는 것”이라는 말을 보고 점을, “폭이 없는 길이”라는 문구를 보고 선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만일 저러한 정의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면 인간의 욕심에 의한 비극이라고 불렸을 것입니다. 점, 선, 평면 그 자체로도 사실 받아들일 수 있는데 괜히 현학적인 표현을 써가며 개념을 더욱 애매모호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굳이 정의내리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 그렇기에 인간의 잣대를 들이댈 경우 그 본질이 훼손되는 것을 무정의술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정의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덜 분석적이고, 덜 계산적인 태도를 취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존재합니다. 무지개를 빨, 주, 노, 초, 파, 남, 보, 7가지 색깔로 구분하는 순간 우리는 빨강색과 주황색 사이의 선홍색을 볼 수 없고 노란색과 초록색 사이의 연두색을 볼 수 없습니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일반 대중에게 전반적으로 퍼지면서 우리는 모든 것에 일일이 과학적 설명을 달려고 애를 씁니다. 특히 의과대학에 진학했다면 과학적 사고의 틀이 더 견고하면 견고했지 덜하거나 그러진 않을 것입니다. 분석하고 정의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적 욕구는 훌륭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는 것은 호기심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만함이라 생각됩니다.

무지개 7가지 색깔 사이의 변화되는 것은 관찰하기에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점, 직선, 평면 이 세 개념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아직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인간의 잣대는 잠시 주머니 속에 넣어놓고 현상 그대로를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윤명기 편집장

<zzangny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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