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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의사들은 왜 불안한가

110호/오피니언 2016. 7. 10. 12:21 Posted by mednews

의사들은 왜 불안한가


혜성처럼 나타난 알파고가 세계 최강의 바둑기사 중 하나인 이세돌을 꺾은 것이 벌써 한 달도 더 지난 일이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대국 결과에 열광했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자신들의 경험이나 가치관에 기반을 둔 온갖 해석들을 쏟아내었다.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을 연상하며 ‘인공지능 때문에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류의 강경한 주장의 실현은 적어도 아직 수십 년은 먼 일이겠지만,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곧 다가오리라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는 것 같다.

이 막연한 불안과 흥분이 혼재하는 혼란은 의료계에서도 별 예외가 아니었다. 대국의 인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대학병원 의국에도 함께 찾아왔고, 의사들의 높은 관심은 막 새학기를 맞은 PK들에게도 공유되었다. 

‘솔직히 B과는 알파고 같은 게 도입되면 바로 망할 것 같지 않니? 너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 A과는 생각과는 달리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말씀이야. 적어도 앞으로 나 은퇴할 때까지는 안심이지.’ 필자는 우연히 그 B과가 바로 다음 실습이었는데, 그 선생님의 말씀은 이렇다. ‘우리 B과는 저런 게 도입돼도 백년은 안심이야. 이건 도저히 사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사실 A과에 동기가 있는데 그 친구 미래는 좀 걱정이지.’ 

그에 대한 필자의 반응은 이랬다. ‘앞으로는 의대에서 학생 안 받는 날도 생기겠다. 그래도 1년만 더 다니면 졸업하니까 안심이야. 일찍 태어나서 다행이지.’ 다들 다른 의사들 걱정을 해 주며 자신들은 불안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런 높은 관심과 걱정은 스스로의 불안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쇼생크 탈출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문구처럼 ‘심판의 날이 곧 오리라’ 는 사실에는 동의하는 듯하다. 물론 필자를 포함해 나 자신은 괜찮겠지만 말이다. 

의사들은 알파고로 말미암아 왜 불안할까? 프랑스의 유명 작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Status anxiety)’에서 사람의 불안의 출발은 ‘지위(Status)’에서 오는 것으로 정의했다. 현대에서는 특히 경제적 성취로 대표되는 이 지위는 높을수록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 등을 보장해 즐거운 결과를 낳게 되며, 타인에게 배려 받고 귀중히 여겨지게 된다. 

우리의 불안은 이 지위의 변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은 사다리를 올라가지 못 한다는 사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낮은 단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실패는 굴욕감을 주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 높은 지위를 평생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이론이 맞다고 전제한다면 의사의 불안은 사다리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의 구체적인 원인으로 크게 애정결핍, 속물근성,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의 5가지를 꼽았다. 모든 것들이 의사에게도 해당되겠지만 특히나 불확실성이야말로 가장 막연하면서도 의사들에게 쏙 맞는 알파고 쇼크의 원인이 아닐까 싶다. 

의사들에게 불확실성은 항상 같은 편이었다. 의사들은 누구에게 갈지 모르는 공부에 관한 재능(최소한 암기력만은)을 얻었고, 의대에 가기 위한 교육, 그리고 다니면서 내야 할 등록금을 버틸 수 있는 부모의 금전운이라는 큰 불확실성에서 이미 승리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어떤 전문직보다도 안정적인 전문직이라는 의사의 길을 가며 한숨 돌리는 중에 알파고라는 복병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시대의 지성을 자처하며 근거중심의학을 외치고, 과학의 꽃이라는 의학의 길을 가는 의사에게 인공지능은 모순을 던져주는, 불확실성 그 자체이자 불안의 씨 그 자체인 덩어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인공지능이야말로 과학 그 자체이자 현대 과학의 정수인데, 그것이 가게 될 길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도 상상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의사들이 당당하게 높은 지위(Status)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전문성 때문이고, 의사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도 전문성 때문이다. 견고하게 전문성을 바탕으로 누려온 권력들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사람끼리 경쟁할 때는 가장 표준화되고 합리적인 교육체계인 의대/의전원을 졸업한 의사들을 이길 사람이 없겠지만, 인공지능은 이야기가 다르다. 기원 근처도 한 번 안해본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는 광경을 지켜보았으니까. 

의사들이 불안한 것은 자신들의 의료행위에서 전인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순순히 인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진단, 치료 등 모든 과정의 의료행위들이 프로토콜로 치환되고 알고리즘을 통해 결정된다는 것은 환자들이 가장 치료효과가 좋은 표준화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의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덜 교육받은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다는 말이고, 시간이 더 지나면 사람이 필요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의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계를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 할 수 없는 부분들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환자를 그 사람의 병변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라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전인의학의 마음은 의료 현대화 이후 가장 먼저 사라져가 희미해졌지만 역설적으로 의사의 전문성을 지탱하는 가장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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