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갑골의 형태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종속이론'이라고 하면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느끼는 우리들. 호염기성구보다 호중성구가 훨씬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실물 무역량보다 금융자본 이동양이 천 배 가까이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한 우리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낯설어 하고, 모르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그래서 올해 의대생신문에서는 연중기획으로 '의학과 인문사회학 간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6권의 책을 선정해 연구모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통섭'이 시대의 유행이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지만 2만 의대생 모두가 해리슨과 루이 알튀세르에 대해서, 로빈슨과 미셸 푸코에 대해서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하며 2009년 첫 연재를 시작합니다.
<현대 자본주의와 보건의료> _비센트 나바로
1970년 대 말 근대 자본주의는 사상 초유의 위기에 빠집니다. 그때까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던 케인즈주의가 더 이상 통용되는 않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경기 침체 속에서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출현이죠. 실물경제가 가라앉으면서 서민들의 불만은 폭발했고, 사회적 반작용의 결과로 보수주의 정당들이 서구 주요 국가에서 성공적으로 집권하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인 하이에크를 열렬히 신봉하던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죠. '경제 살리기'라는 한 마디로 총리와 대통령에 당선된 그들은 곧 케인즈주의를 폐기처분하고 신자유주의 시대의 막이 올랐음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거시경제지표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은 오히려 더욱 더 큰 불안을 떠안게 되죠. 고용불안이 증대되고 복지예산이 드라마틱하게 삭감되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시위가 일어났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죠.
의사들과 의대생들의 착각
존스홉킨스대학의 의료사회학 교수인 비센트 나바로의 <현대 자본주의와 보건의료>는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나온 책입니다. 당대 보건의료의 위기상황이 바로 당대 자본주의의 위기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하지요. 마르크스주의자인 저자는 당시의 자본주의를 계급론적으로 해석하고 보건의료의 구조 역시 이러한 계급론에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계급론을 바탕으로 보건의료를 해석하는 이유는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사들이 착각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저자가 남 달리 날카롭게 바라본 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의사는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현실이죠.
실제로 서구사회에서 의료와 관련된 입법을 주도하는 이들은 의사단체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은 보험회사였고, 그 다음이 제약회사, 그 다음이 보건당국, 그리고 그 다음이 의료계였습니다. 이는 지금 이곳의 상황과도 별반 다르지 않죠. 다만 우리나라는 국민보험이 시행되는 까닭에 보건당국과 관료들이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의사협회의 영향력은 매우 미미합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대부분의 의사들은 자본력을 가진 자본가계층이 아니라 의료노동을 행사하는 노동자계층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착각을 하게 되었는가?
그럼에도 왜 의사들은 자신을 소자본가(쁘띠부르주아)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었을까요? 저자는 이를 근대의학교육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체계적인 의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던 20세기 초 미국의 연방정부는 '플렉스너 보고서'라는 논문을 통해 당대까지 경험과 관습으로만 이어져 오던 전근대적인 의학교육을 과학과 합리주의에 기반한 근거중심 의학교육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고, 전국 각지에 만연했던 비전문적인 의료학교를 다수 정리하고 소수의 의과대학만 남기는 등의 일대혁신을 단행합니다. 그때 탄생한 것이 바로 지금의 의예과와 의학과 교육이며 당시에 시도된 다수의 혁신적인 교육 내용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의학교육이 전문성에 천착하게 된 것이죠. 언뜻 보면 전문가를 배출하는 전문적인 교육이 가장 합리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극도로 실용성을 강조하고 분업화, 파편화된 의학교육은 의대생이 의사라는 전문가 집단이 되었을 때 사회 현상을 도외시하고 탈정치화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이죠. 간단히 생각해봐도,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저자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한국처럼 여전히 플렉스너식 전통의료교육 체계를 따르는 국가의 의과대학교육과정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역시 의학교육을 전문화, 분업화함으로 의대생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종사하는 것에 대해서 폭넓은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며, 전문화와 분업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에 따라 사회에서 계급관계를 재생산하고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게 됩니다. 이런 계급화는 의사-간호사 간에 극명하며, 의사-의대생, 의사-의사, 심지어 의대생 내에서도 계급관계를 고착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단하게 짜인 질서와 전문화에 대한 강요는 의학교육 과정 안에서 살고 있는 학생들의 창조적 가능성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죠.
저자는 이런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의학교육 뿐만 아니라 보건의료 전반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영어권 국가에서는 제국주의 시대의 수탈과 같은 형태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의사나 간호사를 배출하는 데 드는 금액이 100억 유로가 든다고 하면, 남아공처럼 영어권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30억 유로가 든다고 칩시다. 다수의 아프리카계 보건의료인은 더 나은 조건을 따라 영국으로 유입되는데 영국은 제도적으로 이를 장려합니다. 그렇다면 국가적으로 70억 유로의 잉여가치를 제 3세계로부터 수탈하는 형태가 되는 것이죠. 보건의료시장을 포함해 노동시장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노동력의 국제적 이동은 고급 인력을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 고스란히 부유한 국가로 빠져나가게 함으로써 제 3세계가 가지는 문제점을 고착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착각을 넘어, 의료계 바깥과 함께하기 위하여
이런 현대 보건의료의 위기에 대해서 저자가 소개하는 대안은 다소 촌스럽습니다. 보건의료의 위기가 타개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타개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관점에서 저자가 내놓는 대안은 대체로 사회주의 이론서적에서 볼 수 있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급진적이고, 어떻게 보면 현실성이 너무 적어 공상에 가까운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30년 전의 곰팡이 냄새가 나는 이 책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몇 가지 배울 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환자 한 명 데리고 30분 동안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 하다가 귀 한 번 딱 보고 '아무 이상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몇 십 달러를 받는 미국과 같은 극도의 자본주의 의료사회가 부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서 의료가 극도로 상품화된 시대에 '노동자'인 의사 역시 그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예가 사소한 의료사고 한 번에 길바닥으로 몰리는 미국의 의사들입니다.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것과 누구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가 밥을 벌어 먹어야하는 의료계는 결코 동떨어진 세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료계는 사회의 한 부분이죠. 우리가 유급의 중압감 속에서 야마와 PPT를 들고 순응하는 법에만 익숙해질 때, 그래서 강의실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무지해지고 무심해질 때, 과연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가장 원초적인 우리의 대의가 희미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언제든 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누구나 잘 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며 이번 글을 마칩니다. 다음에는 미셸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을 가지고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 '다빈치 프로젝트'는 과학과 철학의 예술적 조화를 이끌어냈던 레오다르도 다빈치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다빈치 프로젝트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 현재 비센트 나바로의 <현대 자본주의와 보건의료>는 절판된 지 꽤 오래된 상태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의대생신문 홈페이지(www.e-mednews.com)의 스터디게시판에서 다운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포럼 참가자 - 노해준(가톨릭), 유재호(성균관), 이현석(영남), 정다솔(중앙) 기자
포럼 일시 및 장소 - 2009년 1월 29일,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
이현석 기자 / 영남
<vandalit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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