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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82호(2011.09.05)/오피니언 2011. 9. 13. 11:54 Posted by mednews

기원

몇 주 전 일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오던 친구의 어머님이 내가 공부하고 있는 병원에 입원하셨다. 어떤 병이 의심되어 몇 가지 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친구가 병원을 방문하기로 한 저녁 무렵, 일과를 마친 채 기숙사에서 편한 차림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친구를 마중하러 근처 지하철역으로 나갔고, 그를 만나서는 옷을 갈아입을 사이 없이 곧장 병동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그 층수에 맞춰 혼란이 한걸음씩 다가온다.

당장 두 시간 전, 정장에 가운을 입고 ‘각 잡힌’ 자세로 돌아다니던 공간. 따지자면 보호자 내지는 내원객에 해당하는 신분으로서 편한 차림으로 병동을 다니는 것에 대해 누가 뭐라 할 것이랴. 하지만 대조되는 두 옷차림으로 한 공간을 누비는 나는, 몸뚱이는 변하지 않았으되 같은 사람은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평소에는 어리바리 청년이다가 위기의 순간만 되면 거미줄 옷을 입고 몸을 던지는 ‘스파이더맨’의 심정에는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을 터이다. 이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학교와 병원에 대해 실습학생, 친구에 대해 친구, 친구의 어머니에 대해 아들의 친구, 어머니에 대해 아들, 그리고 또 무엇에 대해 무엇, 각각의 순간마다 흐트러진 직소퍼즐의 한 조각처럼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

비행기가 착륙할 때 조종사들이 주목하는 것은 비행기의 동체 자체가 아니라 활주로의 지평선과 날개의 관계이다. 지금은 그 열기가 다소 식어들었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에 한 획을 그은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와 그를 계승발전한 것으로 평가받는 라캉은 각각 어린아이가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는 과정, 거울 속에서 자기의 ‘대응물’을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자아가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융은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를 통해 개인의 교유한 심리구조와 사회적 요구 간의 타협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주장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분열은 통합된 자아를 구축하기 위한 필요악과도 같은 것이리라. 분열이 제공하는 통합이란 늘 결핍에서 충만으로 수렴해가는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더라도 말이다.

여러 사람들, 여러 환경들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서는 정체성을 정의할 수 없는 존재.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이들을 보며 불의의 사고로부터 받은 상처를 털어낼 용기를 얻은 소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 향하는 결말을 암시한다. 황금 같은 주말 집에서 낮잠 한숨 푹 자는 것을 구태여 포기하고 길거리에 나와 소통을 노래하는 이들, 살아서나 죽어서 자신의 피와 살마저도 나누어주기를 기꺼이 약속하는 이들의 ‘어리석은 행각’도 인간의 이런 존재조건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역사에 남은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를 있게 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고, 인간정신의 승리로 평가받는 귀머거리 베토벤의 합창교향곡도 그의 유년기 시절 성장과정과 당시의 음악사적인 흐름 속에 잉태되어 있었다. ‘마이너리티’가 소외되지 않도록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좁고 어둡고 딱딱한 공간 속, 1500그램 가량의 물렁물렁한 회백색 살덩어리.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기관에 대한 물리적 설명이다. 신경세포는 시냅스를 형성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고 기능할 수 있다. 어느 하나 역할이 주어지지 않은 세포가 없으며, 특정 부분이 기능을 잃으면 다른 부분들이 그 공백을 대신하며 자활을 시도한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정의가능하고 소통을 통해서 치유가능하며 관계 안에서만 스스로 용서 가능하다. 친구의 어머님이 쾌차하시기를 바란다. 약간의 오지랖을 발휘해, 세상의 모든 어머니, 세상의 모든 아들이 아픔을 이겨내기를 희망한다.

편집장 최성욱
<editor@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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