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편집자가 독자에게

79호(2011.02.28)/오피니언 2011. 3. 11. 13:29 Posted by mednews


시지포스의 점근선

전공수업 중에 ‘합목적적’이라는 단어를 종종 마주치게 됩니다. 주로 어떤 병태의 생리를 설명하거나 진화적 결과물을 이야기할 때 들리던 단어입니다. 합목적성이란 사물이나 현상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목적을 동인으로 갖는 나름의 메커니즘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라는 설명방식을 일컫습니다.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많은 걸 쉽게 설명해 주는 이 사고방식은 꽤나 편리하게 쓰일 때가 많았습니다.

이십대의 초반을 거치는 동안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 왔습니다. 여기에는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던 부분을 합목적적인 설명방식으로 풀어내는 것도 포함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사춘기 땐 이해가 되지 않던 아빠의 모습이 이해되기 시작했고, 부조리하다고 느끼던 일에도 나름의 배경이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합목적적인 이해방식을 터득하면서 덤으로 얻은 건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입니다. 세상을 평면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니 당장 슬프거나 괴로울 일이 별로 없어져 좋았습니다. 최근에는 뉴스에서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에 수백만 생명이 생매장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도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정도의 느낌만 받을 뿐이었습니다. 과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안타깝다’고 느꼈을 일에서.

모든 걸 쿨하게 설명해버리는 합목적성이 제법 몸에 밴 건지 요즘은 자기합리화도 꽤 능수능란해졌습니다. 내게도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핑계 한 마디면 마음이 불편할 구석이 없어집니다. 작은 진실도 각자에게 가지는 무게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너그러이 적용해 준 결과일 테지요.

내재적으로 일관된 가치기준이라는 게 존재할까요. 상대주의적 사고방식은 거꾸로 돌고 돌아 나의 안위만을 지지해 주는 안락의자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지 않음에 불편함을 느끼고,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나의 불편함을 부정합니다.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 기회는 쏜살같고 경험은 믿을 수 없으며 판단은 어렵다”는 2500년 전 히포크라테스의 말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첫 신문을 만든 오늘 밤에는 잠이 잘 안 올 것 같습니다.
편집장 최성욱 <editor@e-mednews.com>

'79호(2011.02.28) > 오피니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  (1) 2011.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