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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좋은 의사가 되셔서 제가 다음에 다시 입원하면 잘 치료해 주세요.” 나보다 고작 3살 많던, 중환자실에 기력없이 누워있던 환자가 해준 이 한마디는 지금까지 병원 실습을 돌면서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도 따뜻하게 남아있습니다.
부끄러운 것은 내가 그 환자를 처음 만났을 때 학생임을 떳떳이 밝히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희귀한 유전병으로 선천적인 부신저하증을 앓던 그는 1년에 한번 씩 꼭 병원 신세를 지다보니 척 봐도 의사인지 학생인지 알았던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학생의사 OOO입니다.’ 모든 CPX와 OSCE 프로토콜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험을 벗어난 현실에서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PK들이 자신이 학생임을 밝히기 보다는 마치 의사인 양 환자를 대하곤 합니다. 큰 병을 앓고 있는데, 대학병원까지 왔는데 교수님은커녕 의사도 아닌 학생이 자신을 문진하고 진찰하고 시술하는데 대해 거부감을 갖는 환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생임을 밝히고 양해를 구하기보다는 병원의, 선배 의사들의 권위를 빌리는 편이 훨씬 쉽지요.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 합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소개’를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입니다. 이 기본적인 존중을 나타내지 않을 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권위의 높낮음이 생기게 되지요. 임금을 알현하는 신하가 자신을 소개하지만 왕은 신하에게 소개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요. 따라서 환자는 묘한 불편감을 느끼게 됩니다.
상대방은 나를 아는데 나는 상대방을 모르는 상황도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회진을 돌면서 알게 된 환자와 보호자의 특징 중 하나는 선생님들과 대화를 할 때 명찰을 유심히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회진 중에 자기소개를 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아들 딸 뻘 되는 아이들이 가슴에 ‘Poly Klinic, M.S.’라는 알 수 없는 명찰을 달고 ‘2년 전에 맹장 수술하셨네요’ 하면서 자신에 대해 아는 척을 한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밝히는 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물론 이것은 학생인 지금보다도 의사가 된 후에 더 중요해지겠지요.
쉬운 길을 눈앞에 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학기가 끝나가는 지금에서야 쉬운 길을 통해 맺은 그 관계는 사실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를 밝히고 상대의 이해를 얻어 내는 것, 어쩌면 PK 실습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요.

편집장 김민재/순천향
<editor@e-mednews.com>

'77호(2010.10.11) > 오피니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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