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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합리를 설명하기 위한 합리적 근거

- 우리는 합리적 의사 결정을 하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자궁근종으로 부인과 외래에 환자가 찾아왔다. 환자는 월경 과다와 복통으로 근종 제거 수술을 하고 싶어 한다. 초음파 검사를 비롯한 각종 결과를 보니 자궁선근증과 내막증 또한 동반되어 있는 것 같고 자궁 내 유착이 심해 근종만 제거한다고 해결될 상황은 아니다. 결국 자궁을 적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환자는 이미 폐경되었고 아이를 가질 수도 없기 때문에 아이가 자라는 곳인 자궁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의사는 환자가 가진 질병을 근치적(radically)으로 치료하기 위해 ‘자궁적출술’을 권한다. 하지만 환자는 왠지 자궁이 있어야만 할 것 같다는 이유로 의사의 제안을 거절한다. 의사가 보기에는 환자가 자궁적출이 아닌 근종절제만 한다면 어차피 다시 수술을 해야 할 것이 뻔하다. 현재 상황으로서는 자궁 적출을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환자는 단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합리적인’ 제안을 거절한다. 의사와 환자는 30분간 논쟁을 하다가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으로 끝난다. 

이와 같은 상황은 병원 안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상황이다. 병에 걸렸다는 것을 ‘위험 상황’이라고 할 때, 위험 상황에 대한 지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또한 우리는 왜 위험상황에서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 보다는 감정에 근거한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일까?


위험 지각이란?    


위험 지각이란, 자연 재해, 살충제, 원자력 발전소, 스키 타기, 자동차 운전, 의약품 등에 대한 태도와 판단을 의미한다. 위험지각은 위험한 활동들의 이득과 손실을 따져 수용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정보 처리 과정이다.

위험 지각 의 초기 모델은 카너만과 트벌스키의 내기에 대한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모형에서 시작되었다.(Kahneman&Tversky, 1973 ; 1979) 어떤 사람이 내기의 결과 어떤 내기를 선택하든 같은 액수를 얻는다고 해보자. 확률이 낮은 위험한 내기보다 100% 딸 수 있는 확실한 내기를 선택한다면, 이를 위험 혐오(risk aversive)라고 한다. 경제학적 관점에서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위험을 혐오할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의사 결정 결과 오히려 사람들이 위험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 사람들은 기대치는 매우 큰 금액이지만 딸 확률은 매우 낮은 내기를 선호한다. 둘째, 내기의 결과 같은 금액을 잃을 때 확실히 잃을 내기와 잃을 확률이 높은 내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람들은 확실히 잃을 내기를 택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오히려 위험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기존의 고전적인 경제학적 모델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위험 지각에서 감정의 영향 

   

위험 지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위험 지각 모델은 기존의 통계적 접근에서 더 나아가 심리적 접근을 사용하게 된다. 위험에 대해 판단할 때 손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보다 지식, 신뢰, 성차, 세계관 등의 심리적 요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위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지면서 심리적 접근을 통해 위험 지각을 평가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최근의 연구 결과는 합리의 영역인 인지와 비합리의 영역인 정서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는 로엔슈타인(Loewen-stein et al.,2001) 등이 제안한 위험 느낌 가설(risk-as feelings)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위험 느낌 가설은 위험한 상황에 대한 반응 및 그에 관한 의사 결정은 걱정, 두려움, 공포, 불안과 같은 느낌을 포함한 정서적인 영향을 직접 받는다고 설명한다. 기대되는 결과, 주관적 확률, 기분 등이 모두 인지와 정서에 영향을 주고 인지와 정서는 상호 영향을 주어 선택 행동을 이끈다. 또한 각각이 독립적으로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로엔슈타인 등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느낌이 중요한 입력 이상의 역할을 하며 위험의 인지적 평가와 위험과 관련된 행동을 연결한다고 주장하였다. 

위의 상황에 대입시켜 보면 자궁적출술이라는 위험에 대해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비롯한 인지뿐만 아니라 단순히 수술을 하고 싶지 않다는 정서 또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와 일반인의 위험 지각은?


그렇다면 의사와 같은 전문가와 일반인이 같은 위험에 대해서 지각하는 것이 다를까? 답은 전문가의 위험 평가가 일반인의 위험 평가보다 낫다는 것이다. Slovic 등(1979)은 사람들에게 술, 담배, 수술, 살충제, 원자력 등 30개의 항목에 대해 위험 순위를 정하도록 하였다. 일반인으로 구성된 집단은 원자력을 가장 위험한 항목으로 평가하였지만, 전문 위험 평가자들이 평가한 원자력의 순위는 20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원자력의 위험도가 다른 항목들에 비해 높지 않으므로 이는 일반인들이 실제 원자력의 위험성보다 원자력을 더 위험하다고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위험 판단과 실제 사망빈도와의 상관관계는 일반인에서보다 전문가에서 강하였다. (상관관계가 강할수록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반인들이 추정한 치사율은 실제 사망 빈도 보다 이들의 위험 판단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보다 부정확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전문가 안에서도 어떤 분야의 전문가인지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전문가를 동등한 집단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Kraus등(1992)의 연구는 전문가와 일반인과의 차이를 보여주지만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결과는 위험에 대한 논쟁이 대중의 오해뿐만 아니라 전문가들 사이의 의견 차이에 의해서도 확산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흔히 의학을 합리성에 근거한 학문이라고 한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교육받고 그렇게 교육시킨다. 우리는 의사로서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의사이기 전에 인간인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판단 중에 어느 정도가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궁 적출술을 권하던 의사는 환자가 마음대로 설득되지 않자 화가 나서 그날은 술을 진창 마시기로 결심한다. 그 의사는 얼마 전 위궤양을 진단받고 위산 분비 억제 작용을 하는 항히스타민제인 시메티딘을 복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창희 기자/이화

<patty9032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