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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신과에서의 한달

105호/의대의대생 2015. 6. 18. 17:30 Posted by mednews

프랑스 정신과에서의 한달





지금으로부터 1년여 전 SCOPE 프로그램을 통한 외국에서의 실습을 위한 서류를 준비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프랑스 문화와 프랑스어에 대한 관심때문에 프랑스로 가는 것은 확실히 정한 후였고, 한달간 지낼 도시와 어떤 과로 갈 것인지를 고르는 중이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실습을 시작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어떤 과에서 무슨일을 하고 무엇을 볼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도시는 3지망까지 정할 수 있었는데 1지망은, 예상대로, 모두의 머리속에서 낭만을 담당하고 있는 파리. 그 다음으로 가능한 도시들을 살펴보는데 한달 내내 비구름과 안개와 함께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파리보다 북쪽으로 올라가지는 않도록 하고, 구글에 ‘너무 시골까지는 아닌’ 도시 위주로 이름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시선을 사로잡은 사진 한 장.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Grenoble이라는 도시이다. 산악지역이라 헬기를 띄워서 환자를 싣어오는 외상외과가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외상외과를 지원했다. 그 다음으로 내 관심을 끈 것은 정신과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Deja vu, Van Gogh’ 라 줄일 수 있겠다. 프랑스어로 된 몇몇 정신과 용어들과 함께 프랑스 남부에서 고흐가 말년을 보낸 정신병원과 그를 돕던 의사 Dr.Gachet의 초상화. 프랑스에 있는 정신과에 대한 인상은 이것이었다.





▲ Dr.Gachet의 초상화


올해 초 ‘너는 정신과에서 실습을 돌게 될것이다’라고 메일을 받기 전까지는 내가 정신과를 지원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연락을 받고 보니 막막해졌다. 한국 정규 실습에서 정신과는 티끌만큼도 흥미로운 점이 없었는데다가 정신과에서 주로 하는 일이 ‘면담’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과 때 열심히 배웠다지만 본과에서의 3년이라는 시간은 모든 것을 잊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언어의 높은 벽을 가소로운 수준의 정신과 지식과 고흐라는 낭만으로 넘을 수 없다는 결론은 빠르게 나왔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필자는 3월 2일자로 기분장애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2층짜리 작은 정신과 병동 1층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3월 한달간 프랑스 정신과를 체험하고 돌아왔는데 본인이 정신과에 전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미천한지라 병원 전체의 분위기만 전달해보고자 한다.

첫날 병동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옷차림이다. 학생들뿐 아니라 의사들도 청바지에 라운드넥 반팔티셔츠, 운동화 차림으로 출근한다. 여성들의 경우 하이힐 신는 것도 자유롭다. 전공의 및 학생들이 쓰는, 의국에 비견될 수 있는 방에 가면 깨끗하고 세탁하고 다린 가운이 방 구석에 쌓여있어서 모두가 하얗고 빳빳한 가운을 입고 다닌다. 

그곳의 실습학생들은 PK가 아닌externe 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닌다. 프랑스에서 전공의에 해당하는 interne 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Externe 들은 정신과적인 면담은 참관하는 정도로 배우고 대개는 담당환자의 심전도 찍고 판독하기, 혈액검사나 요검사 등에서 이상이 보일 경우 적절한 문진과 신체진찰해서 원인 알아보기, 추가적 검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검사 의뢰하는 일 같은 것을 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심전도와 청진에서 판막질환이 의심된다면 심초음파 검사실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검사 일정을 잡는다. 또는 소변검사에서 백혈구가 나오면 환자에게 요로감염의 과거력이나 소변볼 때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묻고 관련한 신체진찰을 해보는 식이다. 이것은 학생이 ‘책임지고 해야 하는 일’이기때문에 한국에서의 실습학생과는 다른 차원의 책임감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전공의와 수시로 환자의 상태를 상의하기 때문에 환자가 위험에 빠지는 일(?)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프랑스 의대에서는 병원에서의 실습을 본과1학년때부터 시작해서 수업과 병행하면서 진행한다. 학생마다 나름의 스케줄로 실습과 수업을 듣는다. 때문에 출석이 엄격하지 않은 것이 이득이다. 어제 보이던 학생이 안보이면 ‘수업 갔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기 때문. 정신과 같은 곳은 한번도 돌지 않고 졸업하는 학생의 수도 적지 않기에 정신과를 돌고 있는 외국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정신과에 관심있는’ ‘특이한 학생’의 인상을 본의아니게 심어줄 수 있었다.

회진도 약간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리나라에서처럼 매일 아침저녁으로 도는 형태가 아니고 일주일에 한번 도는데 대신 재원환자 20명가량을 보는데 3-4시간정도 걸린다. 스텝, 전공의, 실습학생, 간호사 1-2명이 참가한다. 방식은 복도에서 담당 실습학생 또는 전공의가 환자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다함께 병실에 들어가서  스텝 선생님이 환자와 면담하는 것을 지켜본다.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 십수명이 방안에 북적이면 환자들이 부담스러워할만도 한데 면담이 잘 이루어지는 점이 신기했다.

물론 유럽이기에 한국 병원에서 볼 수 있는 군대 뺨 후려칠만한 위계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해봐야 입만 아플 듯하다. 선후배간에도, 교수와 학생간에도 없다. 그런 위계질서 없이도 응급환자 잘만 살린다는 것을 잘 확인하고 왔다. 

▲ 고흐가 지내던 정신병원 복도


그렇다면 프랑스 의대생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내가 관찰한 바로는 앞서 소개한 회진이 2시간 넘게 진행되면 슬슬 집중력을 잃어가고 3시간을 넘어가면 ‘도대체 언제 끝나냐’하는 표정으로 삐딱하게 서있는다. 실습하는 과를 고를 때 우선순위는 ‘퇴근이 빠르고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 근무가 없는 과’이다. 날씨가 좋은 주에는 적당히 둘러대고 하루이틀 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한다. 완벽한 환자파악을 요구하고 지식적인 질문을 많이 하는 교수와는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쓴다. 나중에 어떤 전공을 택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의학의 방대한 양에 깔려서 늘 다시 공부해야 하는 자신에 대해 한탄한다. 정리하자면 ‘여기랑 똑같다.’


문지현 기자/중앙

<jeehyunmj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