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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독자에게

84호(2011.12.12)/오피니언 2012. 1. 9. 17:01 Posted by mednews

독선도 위선도 아닌 곳

1. 마지막 신문을 준비하고 있는 즈음, 고등학교 졸업을 하루 앞둔 날 국어 선생님께서 수업을 정리하며 남긴 한 마디가 기억납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잘 먹는 것과 잘 사는 것을 인과관계로 묶는 관용적인 해석대로라면 일신의 영달을 좇는 나쁜 어감이 되지만, 떠나가는 제자들의 앞길에 찬물을 끼얹을 분은 못 되셨던 선생님의 성격상 그 말씀은 개인적 안녕의 달성과 사회적 가치의 실천을 모두 아우르며 살기를 기원한다는 뜻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2. ‘소유냐 존재냐’라는 물음은 대립되는 두 가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도식을 던져 놓았지만, 기존 정당에서 벗어난 인물이 정치적으로 주목받고 부자들이 앞장서 상생을 강조하며 사회적 기업이나 공정무역, 착한 소비 같은 단어들이 귀에 친숙한 요즘, 조화로운 삶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여기에, 의대라는 공간은 이런 대안적 삶의 여건에 한층 가까이 닿아 있습니다.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어느 정도 정해진 길을 따라가게 되는 환경 속에서는 마음먹기에 따라 사회에 만연한 소유의 강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여행을 가면 흔히 “남는 건 사진 뿐”이라며 플래시를 터뜨리곤 합니다. 아마도 멋진 풍경이나 모습을 많이 담아오고 싶은, 그래서 여행지에서의 좋은 기억을 오래도록 손에 쥐어두고 싶은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것은 포착하고자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도 합니다. 마치 밑줄을 그으면서 책을 볼 때 더 집중이 잘 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 때 카메라는 특정 순간에 대해 소유를 제공하는 동시에 존재를 일깨워주는 도구가 됩니다. 소유적 생(生)과 존재적 삶은 불편한 동거 관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연리지여야 합니다.

4. 삼 년 전 이맘때, 어느 모임에서 알게 된 한 친구는 진정 원하는 자기의 모습을 만들어가기 위해 고등학교를 스스로 그만두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제도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 겁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찾아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던 그 친구의 용기에 박수를 보낼 일이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앞에 두고 조금이라도 안정된 길을 택하려는 이들에게 비겁자라는 오명을 안기는 것은 어쩐지 독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지간한 담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위축시키고 마는 깜깜한 현실 앞에서 화살은 개인이 아닌 시스템에 겨눌 일입니다.

5. 스스로를 부풀리려 하는 소유의 속성을 가누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잣대에 부화뇌동하지 않는, 독선 아닌 신념이 필요합니다. 보다 가치 있는 존재양식에 대한 고민이 위선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의 내면에 귀를 기울임과 더불어 타인의 삶에 대한 진정어린 다가감이 필요합니다. 며칠 전 부산에서 있었던 세계 개발원조 회의에서는 일방적 시혜가 아닌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원조도 진화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고 합니다. 소유와 존재든, 나와 이웃이든, 함께 가지 않으면 멀리 갈 수 없다는 믿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편집장 최성욱
<editor@e-med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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