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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 후원 안내

후원 및 광고 2016. 7. 21. 15:04 Posted by mednews


안녕하십니까. 의대생의 지성과 감성, 2만 의대생의 정론지 『의대생신문』입니다.


1996년에 창간하여 올해로 21주년을 맞는 『의대생신문』은 전국 41개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의대생 2만 명을 위한 신문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의대생신문』은 어떠한 이윤도 추구하지 않는 비영리‧학생 단체로서 광고 및 후원을 통한 수익금은 전액 신문 제작 및 발송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매년 6회, 각 회마다 8000부 가량의 신문을 발행하고 있으나 재정적 한계로 인해 수준 높은 콘텐츠 제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후원 요청의 글


매년 학생들을 위해 신문을 발행해오는 『의대생신문』은 전국 의대 내 유일한 정론지 임에도 불구하고 비영리·학생 단체의 특성상 넉넉지 못한 재정 상태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 선배님들의 후원은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광고 제의가 들어오고는 있지만 금액과 기간이 상당히 불규칙한 편입니다. 선배님들의 작은 도움을 받은 신문사 학생기자들이 훗날 의사가 되어 사회에 나아가 더 큰 나눔을 베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의대생신문』은 2016년도 하반기를 맞아 큰 변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다 상세한 의료계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학생 기자를 충원할 예정이며 작년부터 새로 개편한 『의대생신문』 SNS 계정을 더욱 더 활성화하여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학생들과 만날 계획입니다.


『의대생신문』은 전국 41개 의과대학, 2만 의대생에게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의료 이야기를 전해주는 의대 내 유일한 언론 단체입니다. 선배님들의 작은 도움으로 『의대생신문』 후배들의 목소리가 사그라지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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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아기였을 때

111호/문화생활 2016. 7. 11. 18:02 Posted by mednews

당신이 아기였을 때

유아기 애착 관계와 분리 불안 장애

 

 

웹툰 <아이덴티티> 속 등장인물 닥터 와이번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져 분리불안 장애를 겪고 있는 정신과 의사이다. 분리불안 장애 때문에 파리에 있는 아내가 자신을 떠날까봐 극심한 불안 장애를 겪으나, 결국 재회에 성공한다. 분리불안 장애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아기가 엄마의 품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만을 떠올리지만 이렇듯 어린 시절 부모와의 정서적 유대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어른이 되어서까지 장애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유아의 애착관계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어른으로 향하는 건강한 성장의 첫 단계를 알아보자.

인간은 출생 후 그 어느 동물보다도 발달과정이 느리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발달을 적극적으로 돕는 환경에서 아이들은 심리적인 불안을 떨치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어 건강한 성장과 성숙이 가능하다. 애착은 인간의 생애에서 가장 최초에 나타나는 발달문제로서 아이와 양육자 사이의 유대관계를 의미한다. 애착은 근접과 접촉을 추구하는 경향성으로 아이가 자신이 필요할 때에 애착대상을 찾고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애착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느냐에 따라 생존과 성숙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분리불안은 말 그대로 부모와 애착관계를 맺지 못하고 분리될 것만 같은 불안인데, 아이들은 6개월에서 4살이 될 동안 엄마나 자신을 주로 키워 준 사람에게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게 되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부모가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엄마가 동생을 낳아야 하는데 아빠가 아이를 돌봐줄 수 없는 상황이라든지 등의 이유로 유아보호소에 맡겨졌던 아이들에 대한 연구결과가 있다. 아이들은 반항을 하고 크게 울며 엄마를 계속 불러대어 유아보호소 직원들이 이들을 달랠 길이 없었다. 부모와의 분리가 처음이 아니고 재경험이었을 경우 처음보다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 아이들은 분리불안으로 인해 놀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애착으로 맺어진 사람이 곁에 있을 경우에는 안정감을 느껴 아이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탐색하며 역동적으로 놀이를 했다. 주위가 낯선 곳이라고 해도 엄마의 존재가 마련해 주는 안정적인 마음의 기틀 때문에 신나게 놀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자리에서 떠나면 아이는 위협을 느껴 놀이를 중단하고 엄마와의 재회에만 신경을 썼다. 분리불안이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에 대한 흥미를 잃게 했던 것이다. 나중에 엄마가 돌아온 경우에야 아이는 안심을 했다.
닥터 와이번의 경우처럼 어린 시절의 애착관계와 분리불안이 어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아이들이 애착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과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볼비에 따르면 아이들은 타인에 대한 기대를 얼마만큼 양육자를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잣대로 가늠한다고 한다.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아이는 비교적 정서적으로 안정되어있어 엄마가 자리를 떠났을 때도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돌아왔을 경우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을 돌보는 사람이 자기가 필요할 때 있어줄 수 없다는 불신이 이전의 경험에 의해 생긴 경우에는 불안해하거나 불안정한 애착관계가 형성된다. 타인에 대한 개념은 유아가 탄생한 후 첫 2년에 이루어지는데 유아가 얻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아이가 성장한 후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애착관계의 효과가 첫 2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과정에서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양육방법이 아이들의 자율성과 자신감을 길러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행동과학적 접근으로 아이들을 바람직한 행동으로 강화하는 것이 좋을지, 그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의존하도록 만드는 자율적인 방법이 좋을지, 부모가 아이들과 애착관계를 형성하여 자율성의 정도를 높여주는 것이 좋을지 말이다. 모든 이론이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아이들은 부모와 안정적인 애착관계가 성립되었을 때 자율성에로의 도전을 한다고 한다. 이에 따라 애착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부모가 주변에 있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항상 자신이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부담을 갖고 자란 아이는 자율성과 자신감에 손상이 온다. 유아보호소에 한번 맡겨져 엄마와의 분리를 경험했던 아이는 또 다시 맡겨졌을 때 훨씬 더 힘들어한다.
아이가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우선으로 이루어야 할 것은 부모와의 안정적인 애착관계이다. 일단 부모와의 애착관계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나면 아이는 탐험심과 모험심을 가지고 주변의 환경에 대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긍정적이고 효율적인 자아개념의 확립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서예진 기자/성균관
<jasminalex@naver.com>

편집자가 독자에게

111호/오피니언 2016. 7. 11. 17:57 Posted by mednews

새벽 4시 반

 

 

자동차는 직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산길을 들어선다. 굽이굽이 곡선의 형태를 지닌 산길이다. 창밖으로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지만 네비게이션의 기계 음성에 의지하여 자동차는 앞으로 나아간다.

공부를 끝마치고 집을 간다. 보통은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자정 정도가 본과 1학년 의대생의 귀가시간으로 적당하지만 익혀야 할 양이 많은 날에는 어쩔 수 없이 기준을 넘기게 된다. 그렇다고 새벽 4시 반보다 늦어질 수는 없다. 오늘의 밤샘으로 인해 내일 하루를 망칠 수는 없으니깐 말이다.
새벽 4시 반엔 거리를 방황하던 취객들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어제의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환경미화부들의 모습이 관찰된다. 쓰레기봉투가 가득 담겨 있는 트럭 옆을 지나며 오늘에 대해 생각해본다.
새벽 4시 반엔 “오늘 하루”의 시작과 끝이 공존한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나에겐 “오늘”이 끝나 것이지만, 새벽잠을 이겨내며 일하러 나온 환경미화부들에겐 그 순간이 “오늘”의 시작일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을 줄만 알았던 시작과 끝의 만남은 본연의 모순을 잃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다.
둘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면 둘 모두 피곤하다는 것. 그래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피곤함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행복감은 물론이거니와 서로에 대한 원망과 증오 또한 중요치 않아지는 시간이다.
가로등에는 여전히 나방들이 하염없이 몸을 부딪친다. 무엇이 그렇게 절실해서인지 제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뜨거운 벽을 계속해서 두드린다. 얻게 되는 것 하나 없지만 신은 무슨 까닭으로 나방들이 불빛을 향해 달려가게 만들어 놓았을까. 설령 무언가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그만큼의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일까. 조금만 기다리면 더욱 밝은 태양이 뜰 텐데 그 새를 못 참고 보잘 것 없는 가로등 불빛 하나에 제 목숨을 바치는 것일까.
20여개의 가로등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이 세상 가장 참혹한 어둠이 나를 반긴다. 신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손을 더듬어 불을 켜며 방안을 둘러보면 낮 동안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안도감이 듦과 동시에 내 자신이 매우 피곤한 상태임을 깨닫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 형광등을 끈다.
불을 끔에도 눈앞이 밝다. 빛을 차단 시켰으니 참혹한 어둠만이 남아야 맞겠지만 이상한 일인지 옅은 푸른빛이 방안에 남는다. 빛의 근원을 찾다 한숨을 쉬며 창밖을 보니 푸르스름한 빛이 창문을 통과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세상에 도달한 첫 번째 햇살과 함께 잠에 빠진다.

남해 섬들처럼 구름은 각각의 군집을 이루고 그 사이로 오늘의 태양빛이 땅을 적신다. 자동차는 다시 산길을 벗어나 직선의 도로를 달린다.

 

윤명기 편집장
<medschool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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