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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복학생의 편지

- 의대생, 그리고 휴학 -

의과대학 6년,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 총 11년을 뒤돌아볼 세도 없이 시험과 성적의 굴레 안에서 달린다. 이런 일상에서 잠깐의 여유를 찾아 휴학을 고민하는 친구들도 꽤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몇 없다. 이를 실행에 옮긴 사람들을 만나 휴학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년간의 어학연수

중앙대학교 본과 3학년 임세호
예과 1학년 1학기 수료 후 휴학

“모든 일에는 득실이 있다. 실이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양에 비해 얻은 게 너무나도 많다.”

가족이 반 년정도 일찍 캐나다 밴쿠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되어 예과 1학년 여름방학 때 여행을 갔다가 휴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놀라는 눈치였지만, 예과 1학년 1학기만 다니고 휴학을 했기 때문에 반수하는 일부 친구들에 묻혀 오히려 어색하기 않게 휴학을 결정할 수 있었다.
벤쿠버에서 1년 동안 사립어학원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오전에는 그 곳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직접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도 많이 다녔다. 개인적으로는 글 쓰는 것,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캐나다 여행 관련 블로그도 운영하면서 즐겁게 보냈다.
영어 실력이야 예전에 비해 크게 늘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1년간 쉬면서 여유로운 생활 안에서 자기반성과 성찰을 많이 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외국의 문화를 접한 것도 나름대로 강한 충격이어서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생각의 자유로움과 자신감을 많이 준 것 같다.

쮆 복학생의 조언 한마디
당시 20살이었던 나에게 휴학의 경험은 같은 나이의 친구들에게는 전혀 없는 특수한 경험이었다. 휴학을 결심할 때에는 정확히 ‘무엇을 해야겠다!‘라는 굳은 결심과 계획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 힘들다, 그냥 외국에 나가고 싶다는 자세만으로는 휴학하는 기간만큼의 시간의 보상을 받지 못할 것 같다.

걸어서 지구 한 바퀴

가톨릭대학교 본과 4학년 고준걸
본과 2학년 수료 후 휴학

“후회요? 없어요. 돌아갈 수 있다면 돈도 더 많이 모아서 2년 쉴 거예요”

원래 여행하는 걸 즐겨 방학 때마다 다니곤 했다. 하지만 방학이 짧아 항상 아쉬웠다. 동아리 활동에 재시라도 걸리는 날엔 실제 방학은 3~4주 뿐이니까 말이다. 본과 올라와서는 일상이 답답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앞으로 몇 년간의 내 미래가 너무나도 훤히 보인다는 점이 큰 계기가 되었다. 결국 실습 돌기 직전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 3개월 정도 걸렸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오히려 좋아하시더라 (웃음)
7개월에 걸쳐 아프리카 남쪽과 동쪽, 그리고 남미를 다녀왔다. 이런저런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멋있는 것도 많이 보고 왔다. 그 동안 과외로 모은 돈과 값 나갈만한 것들을 처분하여 여행경비를 마련하였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것 같다. 그 당시에는 후회는 커녕 1년 더 여행하고 싶었는데 다녀와서 동기들 졸업하고 의사되는 거 보니 기분이 묘하더라.

쮆 복학생의 조언 한마디
세계일주? 하기 전엔 폼 나 보이지만 생각보다 별것 아니다. 오히려 미칠 듯이 행복했던 적 보다는 귀찮고 짜증나고 우울했던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런데 지금, 또 떠나고 싶다. 지금 당신 인생이 휴학 한 번에 달라지지 않는다. 무난하게 복학할 확률이 더 클 뿐. 좋아하는 일을 질리도록 할 수 있는 1년은 저지르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다. ^^

호스피스 봉사에서 찾은 인생의 의미

울산대학교 본과 3학년 서정한
본과 2학년 수료 후 휴학

“1년 빨리 졸업하고 1년치 연봉을 내 통장에 더 쌓는 것보다 인생을 더 즐기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내 인생 가치를 확실히 하고, 어떤 것이든 즐길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싶었다. 그래서 본과 1학년 말부터 부모님께 휴학을 하겠다고 말씀 드렸으나 허락을 못 받았고, 본과 2학년을 마치고 휴학계를 내기 직전 부모님께 장장 A4 6장 분량의 편지를 썼다. 몇 가지 약속을 받아내시고는 결국 내 결정을 따라주시더라.
지난 1년 동안 지리산 자락 작은 암자, 태능의 한 수도원에서 한 달 정도 시간을 보냈고, 강릉의 한 호스피스에서 실습 겸 봉사활동도 했고, 단기해외봉사도 다녀오고, 4달간 남미 여행도 다녀왔다. 가장 기억에 남고 성장했던 때는 호스피스에서 보낸 3달의 시간이다. 그곳에서 죽음에 대한 사람의 본능적인 태도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고, 의사-환자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았고, 타인의 죽음을 관찰하면서 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더 나아가 죽음 전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어떻게 살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앞으로 의사생활을 하는데 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도 좋은 가르침을 받고 온 것이라 생각한다.

쮆 복학생의 조언 한마디
별다른 계획도 목적도 없이 휴학을 한다면 조금 말리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고민하지 말고 실천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나 뿐인 인생, 억지로 사는 것처럼 살 필요 있나요?!

학원 강사라는 제2의 직업

중앙대학교 본과 3학년 강승리
본과 1학년 1학기 수료 후 휴학

“평범하게 의대과정을 밟는 사람들은 감히 넘보지 못하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이 다니는 대형 토플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처음에는 ‘내 손으로 학비를 벌어보자’ 라는 생각에 시작을 하게 되었는데 하다 보니 자연스레 정이 붙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오히려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는 점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직원들 사이에서 왜 의대생이 휴학까지 하며 강의를 하고 있는지, 왜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하는지에 대해 회자되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절대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의과대학 다니면서 가장 하기 힘든 ‘의대라는 울타리 밖의 생활’을 경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강의를 하면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자신감을 키웠고 성과 중심의 직장생활 속에서 상사 및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사회생활 요령을 터득했다. 그리고 평범한 20대의 고민이라는 것에 시간과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뻤다.

쮆 복학생의 조언 한마디
그 어떤 의과대학 학생이 겪을 수 있는 평범한 경험 외에도 정말 소중한 의대 밖 외부생활을 체험해본 것이라 자부한다. 그렇다고 꼭 휴학을 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교생활 외엔 숙맥일 것이라는 편견을 받는 의대생이라도 열심히만 한다면 의대 외에서의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암벽등반 도전기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본과 2학년 윤석규
본과 1학년 수료 후 휴학

“지금하는 경험들이 그 일로 인한 빚보다 훨씬 더 값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사실 맨 처음 본과를 올라왔을 때부터 휴학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놀고 싶었고, 돌려서 말하면 20대 동안 한번쯤은 내가 하고픈 일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휴학 1년 동안 외국 여행도 갔다 오고, 기타나 중국어도 배웠고, 실내나 실외 암벽도 처음 도전해 봤다. 특히 암벽등반은 올라가긴 전까진 ‘도대체 내가 이걸 왜?’ 하는 오만 생각이 다 들지만 막상 정상에 올라가고 나서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의학과 특성상 정해진 커리큘럼대로 따라 가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분들과 얘기할 수 없던 것이 제일 아쉬웠었다. 그런데 암벽등반에 도전하면서 정말 다양한 직종에 계신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벅스뮤직 이사님, 경찰관이나 소방관, 삼성화재, 패션업계, 은행에서 일하시는 분 등 정말 다양한 분들을 뵙고 각계 각층의 다양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경험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던 것 같다.

쮆 복학생의 조언 한마디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휴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방식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다만 휴학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최대한 많이 해보기를 추천한다. 지금 당장의 기회비용 때문에 망설이기보다는 주변에 도움을 받더라도 해보고 싶은 일은 꼭 하라. 그리고 책 많이 읽기! 이건 정말 권해드리고 싶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도 같은 결정을 할 것인가요? 각양각색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 질문에만은 모두 단호했다. 모두들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함께 했던 동기들과 멀어 지는 것도 아래 학년 후배들과의 새로운 교우관계에 대한 두려움도, 부모님의 걱정과 우려도, 복학생에 대한 그 어떠한 편견도 그들을 막지는 못했다. 용기와 무모함 사이에서 저울질 하며 내린 휴학이라는 결정이 그들 인생에 어떠한 변화를 도모하였는지는 그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결론은 없다. 휴학을 두고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중하되 두려워하지는 말자. 다만, 경중을 가늠하는 저울은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문정민 기자/중앙
<jmmoon@e-mednews.com>